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기대가 만발했다. 'O TRAIN'(오트레인), 코레일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중부내륙순환열차를 타고 하는 여행. 더욱이 테마가 '눈꽃열차'라니. 여행 참가를 신청하고 기다리는 동안 발끝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100년 만의 폭설 운운하며 영동지방의 눈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내 마음은 이미 저 유명했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가 되어 열차를 타고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이런 설렘과 기대는 하루에 버스 7시간, 기차 5시간, 12시간의 차량 이동을 충분히 각오하고 견딜 수 있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환상적인 눈꽃 기행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출발 전 딱 사흘간의 봄볕만 없었다면 말이다.

3월을 코앞에 둔 시간이었지만 한봄같이 푸근한 날씨가 사흘 동안 계속될 때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컸다. 게다가 우리의 여행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춥고 높다는 고지대 태백과 고한 등을 두루 거치는 일정이었다.

제천역을 출발한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지만 출발부터 낭패감이 밀려왔다. 창밖의 경치는 시베리아가 아니라 이미 봄의 초입에 들어선 한국의 지극히 낯익은 초봄 풍경이었다.

눈꽃 기행을 간다는 소식을 알렸더니 나처럼 기대에 들뜬 후배가 풍경 사진을 보내달라고 성화를 댔지만 내가 보내준 것은 겨우 응달에서 버티고 있는 눈 흔적을 담은 옹색한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태백역 부근에 이르니 눈이 제법 넉넉히 쌓인 곳이 더러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등등하게 쏟아지던 동장군의 위용을 잃은 쓸쓸한 퇴물의 잔재처럼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추전역에 열차는 10분간 정차했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열차에서 내려 주전부리를 사먹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떠는 동안에 나는 주변 경치를 두루 살피며 일찍 찾아온 봄을 만났다.

겨울을 느끼러 간 자리에서 만난 봄이 왠지 생경스러웠지만 이 뜻밖의 손님은 또 다른 설렘을 주었다. 봄을 느끼는 순간에 무언가 좋은 일이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도, 그 겨울이 준 시련도 어김없이 봄볕 앞에서는 녹을 것이라는 생각은 놀랍고 행복했다.

그토록 야단스럽던 눈사태도 단 며칠의 따스함으로 흔적 없이 녹아버릴 수 있는 것, 기대 없는 자의 마음에도 찾아와 설렘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것이 봄이었다.

기다림처럼 천천히 가던 기차가 돌아오는 길에는 봄처럼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기찻길을 달리며 나는 겨울의 잔재가 아니라 긴 겨울을 참다못해 성급히 달려온 봄의 설렘을 발견하였다.

   

봄과 함께 다시 제천역에 내렸다. 짧은 기차여행 동안 나는 한 계절을 보내고 맞았다. 우리의 삶 또한 이 여행과 다르지 않으리. 현실의 혹독한 시련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하나 그 심연에서부터는 희망이 이미 싹트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나의 눈이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가 중요한 일. 이 짧은 여행은 이것을 가르쳐 주려고 그토록 큰 설렘으로 나를 흔들었나보다.

함께 간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았다. 크고 든든했다. 겨울 뒤, 봄이다.

/윤은주(수필가·창원다문화어린이도서관 '모두' 운영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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