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갈수록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고 있는 KBS 역사드라마 <정도전>. 옥사에서 마주한 정도전과 공민왕은 '사직이냐 백성이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놓고 물러섬 없는 설전을 벌인다. 노국공주 사후 실의에 빠져 거의 미쳐가는 공민왕이었지만 일개 말단 신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소신을 쏟아낼 만큼 아직 진심이 남아 있는 왕이었다. "노국공주는 원나라 공주임에도 원나라를 몰아내려는 과인과 고려 백성을 사랑한 여자였다. 한데 백성의 고통 따위가 중요한 것이냐!"

드라마의 스토리를 끌고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선과 악의 경계를 되도록 선명히 하는 것이다. 악인은 그저 때려잡으면 그만이기에 선한 쪽의 대의와 선택은 그게 무엇이든 '손쉽게' 정당화된다. <정도전>은 이런 전형적이면서도 빤한 구도에서 비껴나 있다. 물론 이인임이라는 희대의 악인이 있고 정도전을 비롯한 반대세력은 그를 몰아내기 위해 총력을 다하지만, 이인임은 그간 숱하게 보아온 미치광이, 인간 말종이거나 사리사욕에만 충실한 인물이 아니다. 무자비한 악행을 서슴지 않긴 하나 탁월한 지략과 정치력에 진중한 예의까지 갖춘 권력자다. 명나라보다 북원과 화친하는 게 '고구려의 옛 영광' 회복에 유리하다는 명분도 있으며 이성계가 결국 고려를 배신할 것이라는 날카로운 통찰력도 있다. 그는 최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성계에게 고려는 20대에 선택한 수단이지만 우리에겐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숙명이오."

명으로 가는 사신이 죽은 문제로 대립하는 정도전(맨 왼쪽)과 이인임(맨 오른쪽). 이인임은 정도전에게 "세상을 바꾸려면 힘을 기르라"고 말한다.

명분과 명분의 충돌. 대의와 대의의 정면 승부. 다소 교훈적인 말이지만 우리의 배움과 사유는 이런 '진심의 대결' 속에서 보다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북원인가 명나라인가, 자존인가 생존인가, 유능하지만 위험한 적수를 어찌할 것인가, 껴안을 것인가 낮출 것인가 제압할 것인가. 나에겐 그만한 힘과 실력이 있는가? 더 인상적인 건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주역인 정도전과 이성계를 다루는 방식이다. 원대한 이상과 기품으로 똘똘 뭉친 매사 정정당당한 '착한' 영웅들이 아니다. 이인임을 물리치기 위해, 달리 표현하면 결국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외세'(명)를 끌어들이는 일도 마다치 않는 이들이다. "500년 묵은 고려라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나도 괴물이 되겠다"고 다짐한 정도전의 적의에 찬 눈빛은 종종 누가 '우리 편'(?)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긴 정도전의 대의만이 진정한 것이며 이인임의 대의는 거짓된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모든 면에서 원칙과 대의에 충실한 사람은 종국에 이성계·정도전 진영과 대립하게 되는 최영과 정몽주다. 앞으로 전개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미 최근 회에서 정도전과 정몽주는 짧지만 강렬한 진검 대결을 펼쳤다. 정몽주가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외세에 의존하는 방법은 대의에 어긋난다고 하자, 정도전은 그 따위 대의가 지금 뭐가 중요하냐며 자신에게 대의는 오직 백성들의 '밥상의 평화'뿐이라고 맞선다.

드라마 <정도전>을 현실 정치나 방송사 성격과 이어 붙여 불편해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적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편협하고 용렬한 태도다. 적의 대의는 흔히 재단하듯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적의 대의보다 더 위험한 건 오로지 나의 대의만이 숭고하고 심오한 것이라고 믿는 순간이다. 마침 정도전은 보잘것없는 듯하지만 누군가에겐 생의 전부일 수도 있는 수천수만 가지 백성들의 '대의'와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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