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성 3·15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1960년 2차 의거 이끌어

강주성(사진) 3·15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 지난 2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강주성 회장은 곧 3·15의거 기념사업회 그 자체였고, 3·15의거 기념사업회는 강주성 회장이 존재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3·15 의거가 역사적 평가를 정당하게 받지 못한 채 '변방의 투쟁'으로 머물러 있을 때 강 회장은 3·15의거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고 3·15 의거 정신을 만방에 알려나가는 데 헌신했다.

1960년 3·15 의거 당시 시위대를 이끌며 마산 시내를 누볐던 20대 청년은 자신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3·15 의거를 부여잡고 고군분투했다.

고 강주성 회장은 1939년 마산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성호초등학교와 마산동중을 거쳐 마산상고(현 용마고)를 졸업했다. 마산 시내에서 웅변학원 강사로 재직하던 강 회장은 3·15 의거와 대면한다.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가 마산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마산에서는 2차 의거(4월 11∼13일)가 일어난다. 이때 강 회장은 도립 마산병원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도립병원 담장 위에 올라 "부정선거 다시 하자. 폭력경찰 잡아내자"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강 회장은 시위대를 이끌고 무학초등학교를 거쳐 남성동 파출소에 도착해 다시 한 번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외친다.

이날 강 회장은 불종거리와 오동동 파출소를 거쳐 마산경찰서까지 진입했다. 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기에 이른다.

다음날 마산 시내 곳곳에서는 3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뛰쳐나왔으며, 강 회장은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1960년대 '3·15 의거 정신'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강 회장은 '3·15 전국 웅변대회'를 개최해 3·15 의거 정신을 공유해나갔다. 이 대회는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열리고 있다.

초대 이순항 회장에 이어 1994년부터 3·15 기념사업회를 이끌게 된 강 회장은 뚝심 있게 조직을 이끈다. 강 회장은 11년 간 3·15 기념사업회를 진두지휘하면서 '국립 3·15 민주묘지 성역화'와 '3·15 아트센터 건립' 등 굵직굵직한 현안 사업들을 추진해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역사화 작업에도 의욕적이어서 <3·15 의거 기념시집>, <3·15 의거사>, <3·15 의거 기념사진집> 등을 잇달아 편찬하기도 했다.

강 회장 재임 시절 3·15 의거 기념일은 '경상남도 기념일'로 제정됐으며, 이는 이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는 발판이 되었다.

강주성 회장은 마산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호방했으며 두주불사였던 고인은 뚝심 있게 맡은 바 일을 추진하면서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싫은 소리도 품어내는 이였다. 큰 웃음 하나로 선배와 후배들을 아울렀다. 강 회장을 떠나보낸 이들은 "큰 바다 같은 분"이었다는 평가를 잊지 않는다.

살아생전 "3·15와 결혼했다"고 말하곤 했던 강 회장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강 회장을 아버지로 모셨던 '양아들' 정쌍학 창원시의원은 변승기 3·15 기념사업회장과 함께 이번 장례식 상주가 됐다.

정쌍학 의원은 "마산의 거목이 쓰러졌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좀 더 계시면서 후배들을 이끌어주셔야 하는데 이렇게 보내드리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변승기 3·15 기념사업회장은 "3·15 기념사업회의 기틀을 굳게 세운 분이셨고 3·15 의거 정신의 세계화를 마지막까지 고민하신 분"이었다며 강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고인은 6개월 전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2년여 전부터 술을 끊고 "하루 네 갑씩 태우던" 담배도 멀리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매일같이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아마 5단 바둑실력이었던 고인은 마산 시내에 있는 기원을 출입하며 소일했으나 '3·15 의거 기념사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고 강주성 회장을 떠나보내기 위해 장례식장(연세병원)을 찾은 이들은 침통해 했다. 강 회장이 마산 지역사회에 흩뿌린 수많은 무용담을 공유하며 명복을 빌었다.

그렇게 '마산'의 한 시대는 또 저물어 갔으며, 강 회장이 지역사회에 남긴 '명과 암'은 또 후배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자 희망의 빛이 되고 있었다.

고 강주성 3·15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은 24일 국립 3·15 민주묘지에 묻힌다. 이날 오전 10시 국립 3·15민주묘지 참배단에서는 영결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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