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9) 통영별로 25회차

정월 보름도 지났으니 예전 같으면 농사일을 준비하느라 농촌은 서서히 바빠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아내와 길을 나서며 우리 사는 곳을 둘러보아도 몇몇 성질 급한 매화는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고, 볕 잘 드는 언덕 밑에는 바지런한 아낙들이 냉이를 캐며 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말치를 오르다

전북 임실군 임실천 가의 둑길을 따라 말치로 향합니다. 30번 국도를 지나니 서쪽으로 공단이 들어서 있고, 옛길의 동쪽은 농촌 경관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굽이를 따라 열린 길을 걷다가 평다리마을 앞에서 둑길을 버리고 감천로라 불리는 산길을 걸으니 얼마지 않아 군부대를 만납니다. 본격적으로 말치로 들어서는 들머리 양쪽에는 목장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평다리마을을 벗어납니다. 남행하는 고갯길의 오른쪽은 온통 군부대 땅이고, 그곳에 항공대와 포사격장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마침 농성 중인 듯 천막이 쳐져 있고, 확성기에선 진혼가인 양 독경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군부대 안 골프연습장을 지나 확성기 소리가 사라질 무렵에야 말치에 이릅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목장 하나가 군부대 경역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고, 경계에는 옛길임을 일러주는 빗돌이 굳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말치(末峙)

<대동지지>에 나오는 마치(馬峙)로 오원역에서 20리 거리입니다. 말(末) 또는 마(馬)로 적는 것으로 보아 전북 임실군 임실읍과 성수·오수면을 가르는 지경고개의 한가운데 있는 중심 고개라는 의미의 '재'라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해동지도> 임실현 영애에는 '말치가 북쪽은 평평하고 남쪽은 급준하며, 길이는 10리'라 했습니다. 실로 임실에서 고개를 향해 오르는 북쪽 구간은 비탈이 밋밋하지만 고갯마루에서 오수면 봉산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릅니다. 고갯마루에는 '전참사진공관엽시혜비(前參事晉公瓘曄施惠碑)'가 있습니다. 세운 때는 을축년 일월이라 적기하였는 바, 중부지역에 크게 물난리가 난 1925년이라 여겨집니다.

봉천리로 내려서는데,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있어 살펴보니 서쪽면을 갈아 여럿 새겨 두었습니다. 이 마애비(磨崖碑)는 옛길이 바위 서쪽을 지나 곧장 고개 아래로 이르렀음을 일러주는 귀중한 증거입니다. 5기 정도 비가 새겨져 있는데, 가장 왼쪽에는 '현감민□□(縣監閔□□)'라 새겼고 아래쪽은 묻혀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도 새겼으나 늦은 오후에 육안으로 판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곁으로도 비를 새긴 흔적과 비를 만들려고 정으로 쪼아 낸 자국이 있고, 맨 오른쪽에는 '부경박기순□□□(副卿朴基順□□□)'이라 새긴 빗돌이 있습니다. 박기순을 <조선왕조실록>에 검색해보니 고종 43년(1906년) 7월 3일 시종원(侍從院) 부경에 임명한 기록이 있어 빗돌이 이즈음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탁본을 하거나 차분하게 읽어낼 여유가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구했겠지만, 노루꼬리만큼 짧은 섣달 그믐 즈음 해가 기울고 있으니,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 나그네에겐 일모도원(日暮途遠)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고갯마루에서 대판이마을 들머리의 과수원까지는 옛길의 자취가 흐릿하지만, 시멘트로 포장한 농로가 잘 남아 있어 길을 잡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옛길은 산자락을 따라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습니다. 봉천리 봉산마을에 이르렀을 즈음 해가 져버려 우리는 택시를 불러 타고 차를 둔 곳으로 돌아가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봉황산 자락을 걷다

다음 주말에 다시 찾은 우리는 봉천리 봉산마을에서 길을 잡아 나섰습니다. <조선오만분일지도> 전주11호 임실에는 말치를 내려선 길이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곧장 들을 가로질러 둔남천을 건너 군평리에서 하천의 동쪽으로 열린 길이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봉황산 자락을 따라 열린 길입니다. 큰길은 지금의 봉천교 즈음에서 둔남천을 건너 그 동쪽으로 열렸습니다. <해동지도> 임실현에도 그렇게 그려져 있습니다만, 현대 지형도에는 들판이 반듯하게 경지정리되어 옛길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옛 정취를 살필 수 있는 자드락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래도 결국 국평교에서 만날 테니까요.

오늘 출발지인 봉천리 봉산(鳳山)마을은 이름에 봉이 있고 지도에 뒷산이 봉화산이라 적혀 있어 봉수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니 어디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궁금증을 달래지 못하던 차에 지명 유래를 살피니 비로소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뒷산이 봉황산이라 붙은 이름이지요. 잘못 표기된 지명 때문에 빚어진 오류를 밝히느라 속을 태웠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곳 봉산마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당당한 자태로 우뚝 서 있습니다. 앞으로는 바둑판식 고인돌 모양 제단이 놓여 있고, 이 글이 나올 때면 제대로 된 상을 받았을 테지요. 250살 정도 된다고 하였으니, 오가던 길손들이 아래서 다리품을 쉬어 갔겠죠.

봉산을 거쳐 냉천(冷泉)에 이르면, 말치에서 내려오는 임도와 만납니다. 마을 이름이 찬 우물인 것은 오래 전에 원님이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물맛이 시원하다 해서 붙여졌다 하니 이 또한 옛길의 이력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옛길은 뒷고래를 거쳐 오촌에 이릅니다. 유래비에 마을 앞 바위가 자라처럼 생겨 자라울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고친 지명이라 적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는 산모롱이에는 한국전쟁 때 산화한 육군 일등병의 묘비가 있고, 17번 국도와 만나는 독뫼마을에는 오수의견상이 있습니다. 마을 앞 독뫼(돌산) 북쪽에는 대정(大正) 2년(1913)에 세운 김용규 시혜비와 을축년(1925?)에 세운 박용만 시혜비가 있어 길의 이력이 만만찮음을 보여줍니다. 예서 옛길은 17번 국도와 선형을 같이하다가 국평교를 통해 둔남천을 지나 옛 17번국도와 비슷한 경로를 따라 오수(獒樹)에 듭니다.

◇오수에 들다

국평교에서 오수로 이르는 길은 둔남천 동쪽 기슭을 따라 열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붐볐으나 17번 국도가 크게 동쪽으로 선형을 옮기는 바람에 지금은 차량 운행이 드물어 한적하니 걷기 좋은 길이 되었습니다. 또한 드물게 보도까지 마련돼 걷기에 더할 나위 없습니다. 곧게 남행하던 길은 대명리 들머리 매초래기 모퉁이에서 동쪽으로 급격하게 꺾여 상신촌(매초래기)으로 듭니다. 지금은 쓰지 않는 빨래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 아내는 신기한 듯 주변을 맴돕니다. 내재된 여성성을 새삼 깨닫기나 한 듯 말이죠.

전북 임실군 말치에서 오수로 가는 옛길. /최헌섭

마을을 벗어나 오수로와 만나 얼마 걷지 않으니 냇가 양쪽에 선돌이 있습니다. 둔남천 북쪽 선돌을 살펴보니, 다른 표식은 없고 전면에 페인트로 쓴 글은 벗겨져 버렸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던 중 <한국지명총람>12(전라북도)에 둔남천에 두었던 보를 장승보(長承洑)라 기록하였으니, 자리를 지킨 지가 오래 되었나 봅니다. 예서 옛 오수역으로 이르는 길은 둔남천 가를 따라 곧게 나 있습니다. 이 길이 닿는 즈음은 오수도 찰방이 주재한 오수역(獒樹驛)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 지명은 예서 비롯했으며, 연원은 고려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오수역은 고려 시대 남원도(南原道)에 속한 12역 가운데 하나로 당시 속한 곳은 거령현(居寧縣)이었습니다. 그런데 <국역 고려사>는 오수역이 있던 거령을 지금의 장수군 번암으로 비정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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