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의 향기]위암 투병 중 별세한 홍여표 민주노총 마창지역협 초대 의장

"구속만 세 번입니다. 혹자들은 구속이 될 줄 알면서도 끝까지 투쟁하는 그를 두고 '멍청하다', '무식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노동운동가가 가진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탄압과 유혹에 굴하지 않는 정신, 그 정신이 지금의 그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동운동가 홍여표 동지 후원회를 이끈 조태일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정책국장은 생전 그에 대한 느낌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홍여표 민주노총 마창지역협의회 초대 의장이 13일 새벽 숨을 거뒀다. 향년 53세. 홍여표 전 의장은 지난 2012년 5월 위암 진단을 받아 항암치료를 해 왔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지난해 여름 병원 입원 전 고인의 생전 모습. /노동운동가 홍여표 동지 후원회

홍 전 의장은 창원지역 노동현장 투쟁의 산증인이다.

효성중공업 노동자였던 그는 어용노조가 들어서 실질적인 노조활동이 이뤄지지 않았던 사업장 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노조민주화를 위해 효성중공업 창원공장 노조 내에 '효성중공업노조정의회'(노정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그는 어용노조에 의해 제명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홍 의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88년 지부장 선거에 출마해 어용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렇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지부장 당선 이후 투쟁을 계속하다 구속된 그는 이듬해 효성중공업 노조위원장 선거에 옥중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그의 지부장 당선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고되는 아픔을 겪었다.

해고 이후에도 그는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고 다양한 투쟁 활동을 벌였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기 전 노동연대단체였던 '마창노련'(마산창원노동조합연합)에서 사무처장을 맡은 그는 지난 1996년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나서 민주노총 마창지역협의회 초대 의장을 지냈다. 의장이 된 후에는 숱한 구속의 나날이었다.

그해 7월 대림자동차, 일본계 자본인 한국산본의 노조 탄압과 공장 철수 문제에 맞서 싸우다 6개월여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이듬해 초 만기 출소한 그는 이후에도 '민주노조 사수', '민주노총 건설'에 앞장서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노동법 개정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선 것과 동시에 권영길 당시 '국민승리21'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긴급 체포돼 다시 구속에 이르기도 했다.

계속되는 수배와 구속 생활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수배된 상태에서 어머니 환갑을 맞아 집에 몰래 왔다가 뒤를 밟은 경찰들에게 잡힐 뻔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동료의 도움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집 뒤 대나무밭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집을 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출소 후인 지난 1999년 다시 민주노총 마창지역협의회 의장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낙선 이후 활동 근거지를 금속노조로 옮긴 그는 2001년 금속노조 경남2지부 초대와 2대 부지부장을 역임한다. 이때 대림자동차지회, 두산기계지회, 범한금속 지회 교섭대표를 하며 단사 교섭이 아닌 금속노조 차원의 교섭을 처음으로 진행하며 특유의 교섭력과 지도력을 보였다.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가 가져야 할 교섭활동 방향을 수립하고 금속노조의 결속력을 끌어내고자 온 힘을 다했다.

지난 2002년부터는 자신이 일한 효성중공업 복직 투쟁에 나섰다. 약 2년 뒤 소기의 성과를 이룬 그는 더는 노동조합 활동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귀농으로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노동운동에 잔뼈가 굵고 다방면으로 능한 그를 노동계는 물론 정치 쪽에서도 탐낸 것으로 동료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영달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윤종현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총무국장은 "홍여표 의장은 늘 자신이 노동조합원으로 살면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산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며 "그는 철저하게 노동운동이 가진 목적이 무엇인지만을 파고든 천생 운동가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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