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다행히(?) 논란 끝에 무산되긴 했지만 '대학 총장추천제'라는 삼성의 새 채용 방식에 대한 몇몇 진보 지식인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평소 누구보다도 사회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이들이기에 더욱 놀라웠다.

문화평론가이자 '좌파 지식인'으로 이름 높은 이택광 경희대 교수. 문제의식은 지지할 만했다. 그는 지난 1월 27일 S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삼성이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대학을 서열화"하고 있으며 "대학 교육이 의미가 없는, 말 그대로 졸업장 따는 교육으로 전락하는 데 기업이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럼 마땅히, 고려대 총학생회가 용기 있게 그랬던 것처럼 총장추천제라는 삼성의 또 다른 '횡포'는 거부되어야 했다. 한데 아니다. "삼성이 내놓은 할당제를 계기로 좀 더 다양한 방식의 채용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타협적 태도에 머문다. 이 교수가 속한 경희대가 60장을 할당받았다는 사회자의 말에 "상당히 우수이지 않겠냐?"고 답한 것도 그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삼성께서 부여한 대학 순위 꽤 앞줄에 섰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고려대 총학생회가 지난 1월 27일 발표한 '삼성 총장추천제 거부 성명'에 첨부한 이미지. /고려대 총학생회

그렇다. 말 그대로 '하사'와 다름없는 '부여'였다. 삼성그룹 측은 1월 15일 브리핑에서 "모든 대학의 총학장에게 인재 추천권을 부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무리 대학이 자본에 장악당한 지 오래고 정치·경제·사회 전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삼성이라지만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용어 선택이었다. 일개 기업이 자신이 무슨 거대 통치권력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며 한 나라 대학 교육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형국이었다.

역시 진보 지식인으로 잘 알려진 김종엽 한신대 교수도 분노에 동참했다. 1월 29일 자 <한겨레> 칼럼에서 총장추천제는 삼성의 '폭력적 제안'이자 '지배의 관철'이라고 했다. 대학 입장에선 '최악의 굴욕'이었다. 근데 그 또한 글 말미에선 이택광 교수와 비슷하게 '새로운 추천제' 운운하며 슬며시 삼성에 다시 손을 내밀고 만다. 삼성 직원 출신 대학의 반비례로 추천 인원을 할당하거나 삼성 직원을 배출하지 못한 대학의 인재에겐 그냥 합격증을 주라는 거였다. 방식만 좀 달리한다면 삼성의 '지배의 관철'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김 교수 제안대로 한다고 대학 사회가 삼성에 머리를 조아리는 참담한 현실이 달라질까? 어떤 식으로든 할당을 받은 대학은 대학대로, 그리고 거기에 속한 학생들은 또 학생들대로 오직 삼성 내지 대기업 합격증을 쟁취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진보 지식인이라면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학벌 구분 자체를 철폐하라고 주장해야 옳았다. 학벌이 낮은 사람을 비정규직·하청 등 불안정 노동자로 주로 채용하는 시스템은 물론, 채용자들을 곧바로 노예 신분화하는 전근대적인 무노조 정책 역시 단호하게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해야 했다.

물론 김종엽 교수가 토로한 대로, 그 자신이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삼성 취업을 희망하는 재학생, 입시생을 둔 학부모 눈치"를 보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성 추천장을 한 장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식인들의 바로 그 모습이, 작금의 '굴욕적인' 대학 사회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 아니겠는가. 진보 지식인마저 무너지면, 과연 누가 삼성 권력을 견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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