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지방선거 유권자가 갑이다] (상) 을이라고 뽑았더니 갑이더라

경남도민일보는 6·4 지방선거 슬로건을 '유권자가 갑(甲)이다'로 정했다. 이는 '선출직이 을(乙)이다'라는 말과 같다. 선출직은 유권자에게 선택받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선거를 유권자가 선출직에게 공무를 맡기는 계약 과정이라고 본다면 갑은 당연히 유권자고 을은 선출직이다. 선거 기간 유권자 앞에서 조아리는 선출직 후보를 보면 갑을 관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 관계는 선거 기간만 지나면 뒤집히는 일이 허다하다. 도대체 왜?

일반적인 계약 관계에서 갑은 을보다 우위에 있다. 을은 갑이 제시하는 주문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는지 증명하고 선택받아야 한다. 조건을 어기면 계약 파기에 이은 치명적인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선거 기간 선출직 후보는 유권자가 얼마나 두려운 갑이고 자신이 얼마나 충실한 을인지를 증명하고자 모든 힘을 쏟는다. 하지만 당선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선출직은 을답지 않은 을, 갑의 뜻을 거스르는 을이 되곤 한다. 선거 기간 적용됐던 일반적인 갑을 관계는 선거가 끝나면서 변질하곤 한다.

◇선출직, 을이 맞기는 맞나? = <경남도민일보>가 지난 2013년 12월 31일 자 1면에 보도한 '올해 우리를 기쁘게 한·화나게 한 10대 뉴스'를 보자.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화나게 한 뉴스' 1위는 '진주의료원 폐업 강행과 도의회 해산 조례 날치기 통과'였다. 2위는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으로 주민 음독·자살 시도'이다. 뒤이어 △새 야구장 진해 건립 두고 창원시-NC 갈등 △경남도, 도와 시·군 무상급식 예산 일방 삭감 △창원시 청사 갈등과 조례안 날치기 통과 △고용노동부,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 △경남대 철학과 결국 폐과 △경남도 출연 문화예술기관 임의 통폐합 순이었다.

10개 뉴스 가운데 7개가 지방선거를 통해 뽑은 선출직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내용이다. 진주의료원 폐업은 홍준표 지사, 조례 날치기 통과는 새누리당 소속 도의원이 당사자다. 새 야구장 논란 당사자는 박완수 전 창원시장이다. 무상급식 예산 일방 삭감은 또 홍 지사, 창원시 청사 갈등과 조례안 날치기 통과는 역시 박 전 시장과 창원시의원이 일으킨 문제다. 경남도 출연기관 임의 통폐합 역시 홍 지사 관련 뉴스다. 밀양 송전탑 뉴스도 엄용수 밀양시장만 당사자라고 특정할 수 없어서 그렇지 책임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한 해 통틀어 지역민(유권자)을 화나게 한 뉴스 대부분은 그 주체가 선출직이었다.

특히 진주의료원 폐업, 진해 야구장 문제 등은 몇 차례 공개된 여론조사에서도 반대가 우세하거나 찬반이 팽팽하게 갈렸던 사안이다. 일반적인 갑을 관계가 작동한다면 지금처럼 진행되기 어려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권자, 갑은 갑인가? = 선출직 존재가 유권자 선택에 달렸다는 점만 보면 유권자는 갑이다. 하지만 중요한 지점에서 '유권자가 갑'이라는 명제는 흔들린다. 갑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게 투표 말고는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계약 관계에서 갑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는 을은 치명적인 손해를 피할 수 없다. 계약서 내용 대부분은 을이 갑의 주문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에 대한 책임 명시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당선된 을이 임기 동안 갑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을 때 입는 손해는 거의 없다. 즉 갑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을도 문제지만 을을 압박할 수 없는 갑도 문제인 셈이다.

그래서 '유권자가 갑'이라는 슬로건은 '유권자가 실제 갑이 맞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이는 '유권자는 선출직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그 수단이 오직 선거뿐이라면 갑은 선거를 통해 을을 통제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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