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8) 통영별로 24회차

오늘은 아내와 둘이서 지난 여정을 마무리한 전북 임실군 관촌에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마침 장날인지 길가 양쪽으로 거리 가게가 서 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제법 부산스럽게 오가는 것이 설을 앞둔 시골 장터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줍니다. 장보러 온 사람들과 섞여 크지 않은 장터를 둘러보며 몸을 풀고 있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이 생선 좌판을 가득 채우고 있어 살펴보니,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홍어입니다.

그런데 지금 설을 맞고 있지만 심기가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곳곳에 내걸린 플래카드에 그들의 심기를 어지럽힌 정체가 있어 살펴보니, 임실 대곡리에 35사단 사령부를 유치하면서 함께 오게 된 항공대와 포사격장 때문에 군과 주민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하자면 정부와 군이 그들을 홍어 거시기로 여긴 것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과격하게 드러낸 것이겠지요.

임실이 어떤 곳입니까? 예부터 고추가 유명한 청정지역이면서 근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치즈의 고장이 아닙니까? 치즈가 소의 젖으로 만드는 줄 안다면 왜 이곳 주민들이 그토록 항공대와 포사격장을 반대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밀양서도 보듯이 언제나 그 일과 직접 인과관계가 적은 곳의 소수자들이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에 마음이 저려옵니다.

◇용은치를 넘다

오원강을 건넌 옛길은 마웃들을 가로지릅니다. <조선오만분일지도>에는 마웃들 중간 즈음의 터지내에 있던 작은 들말을 지나 창인들을 가로질러 옛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찾기 어려워 둑길을 따라 임실천을 건너 창인리 청운마을에 듭니다. 마을 임실천에는 도마교(都馬橋)라는 다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 없고, 마을도 군부대가 들어서며 없어졌습니다. 이곳에 탄약창이 들어설 때 이미 갈등은 예고되어 있었지만, 하나를 양보하니 이를 첨병으로 삼아 사령부 전체가 옮겨올 줄을 그땐 미처 몰랐겠지요. 그럼에도 옛길은 부대 동쪽으로 잘 남아 있어 용은치(龍隱峙)를 넘어 밖두실(용은치 마을)로 듭니다. 고개를 달리 용운치(龍雲峙)라고도 하는 것은 운중발용(雲中發龍)의 길지에서 비롯했다고 전합니다.

◇비리길을 걷다

용은치 남쪽의 밖두실에서 옛길은 임실천 서쪽 곡벽을 따라 열렸는데, 그 증거가 마을 남쪽 냇가 퇴적암 벼랑을 제단처럼 깎아내고 세운 '효자증통정대부비서감승문우현지려(孝子贈通政大夫秘書監丞文禹鉉之閭)'입니다. 정려를 받은 해가 광무(光武) 9년이라 했으니,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7월입니다. 마을 어른께 옛길을 여쭈니 예전에는 그리로 다녔다고 일러줍니다. 그러나 지금은 찾기가 만만찮아 보여 망설이다 예까지 와서 그만둘 수는 없는지라 어렵게 비리길을 찾아 나섭니다. 요즘은 통행이 적어 수풀을 헤치며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지만 잘 정비하면 아름다운 옛길을 살려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길은 슬치 북쪽에도 잘 남아 있는데요, 전주천 상류를 따라난 둑길과 상관면 남관진~만마관~슬치~관촌 구간에 남은 폐철로를 이으면 걷기 멋진 길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이곳 비리길은 임실천의 공격사면을 깎아 만든 것은 아니고 그 아래로 흙이 쌓이며 만들어진 곡벽을 따라 연 것입니다. 공격사면 아래로 쌓인 흙 위로 수풀이 우거지면서 위태하지만 이런 곡벽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렇기에 사람과 우마만 겨우 통행할 정도의 좁고 험한 길입니다. <해동지도>와 <조선오만분일지도>에도 옛길은 임실천 서쪽 곡벽을 따라 열린 것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곡벽을 빠져나오니 임실천 둑을 따라 걸을 만한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곳에서 노루인 양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임실천 동쪽 비탈에 옛길의 자취가 잘 남아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돌너설 위로 옛길이 열린 자국이 관찰되나 지금은 칡덩굴이 우거져 걷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 길은 곡벽을 따라 밤나무 과수원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길을 잃어 논으로 내려섭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뒤로 다랑논으로 이어지는 길이 잘 남아 있지 뭡니까.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거지요. 세상 이치가 그 속에 묻혀서는 헤매기 십상이나 한 발 물러서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길에서 또 한 수를 터득합니다.

   

◇임실 돌미륵1

어렵사리 빠져나온 우리는 두곡리 본 마을에서 안전한 보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마을 안길을 지나 두곡제 남동쪽의 얕은 재를 넘어 기림초등학교를 지나 임실로 듭니다. 학교를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드니 임실읍 들머리에서 임실치즈농협을 만납니다. 이즈음이 <해동지도>에 미륵이 있다고 한 곳이지 싶어 산모롱이 바위 벼랑을 살피니 웬걸요, 이곳에 돌미륵을 모셨음직한 작은 감실이 있습니다. <해동지도>에 나온 미륵을 모신 곳이고, 임실역 앞에 있다고 한 굴바우 또한 여기를 이르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감실을 마련한 바위는 전형적인 역암(자갈이 섞인 바위)이고, 아래 노면과 접속되는 즈음에 가장 넓은 곳이 70㎝가량 되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감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안에는 돌미륵을 모실 때 고정시킨 홈으로 보이는 마름모꼴 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곳의 주인인 돌미륵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사라지고 빈 집만 남았습니다.

아쉬운 맘을 달래고 돌아서려는데, 바로 가까운 곳에서 빗돌 하나가 눈에 듭니다. 사암을 써서 묘갈 모양으로 만들었고, '현감이후창회영세불망비(縣監李侯昌會永世不忘碑)'라 새겼습니다. 곁에 건륭사십오년(乾隆四十五年) 경자(庚子)라 새겼으니 조선 정조 4년(1780)에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실 돌미륵2

<해동지도> 임실현 지도에 나오는 미륵을 찾기 위해 자료를 뒤져보니 임실읍 이도리 운수사 경내에 미륵불이 있다고 나옵니다. 이도리 돌미륵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세의 액막이를 위해 세운 절에 남아 있는 것으로 현재 숲은 없어졌습니다. 이곳은 고덕산 산세가 험하여 화재가 자주 나기 때문에 그 재난을 막기 위하여 산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수정(樹亭) 또는 숲정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지금 돌미륵이 모셔져 있는 수정마을 뒤쪽에 '숲정이' 지명이 남은 걸로 보아 원래 돌미륵이 있던 자리가 이 일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실천을 거슬러 말치를 넘다

임실에서 두 곳의 돌미륵을 두루 둘러보고 임실천을 건넌 길은 갈마리로 듭니다. 옛 지도를 살피니 기림초교 남쪽 돌미륵에서 말치로 이르는 옛길은 갈마리정미소에서 임실천에 드는 냇가의 둑길을 따라 열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옛길과 17번 국도가 달라지게 되는데, 지금도 갈마~해평~평다리~막음개~평지를 거쳐 말치에 이르는 경로가 잘 남아 있습니다.

전북 임실군 밖두실에서 임실천 비리길을 걷다. /최헌섭

그런데 갈마교 남쪽 둑길에 큰 빗돌이 하나 눈에 듭니다. 통영별로를 벗어나 있긴 하지만 길의 잣대인 빗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곳으로 향합니다. 대가리가 둥근 묘갈 모양에 '어사민공달용(?)청덕혜민불망비(御史閔公達鏞(?)淸德惠民不忘碑)'라 새긴 불망비가 서 있고, 세운 해는 뒷면에 숭정기원후사무오사월일(崇禎紀元後四戊午四月日)이라 적어 철종 9년(1858)임을 밝혔습니다. 그에 관한 정보를 구하고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니 철종 9년에 전라좌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내의 현감과 찰방의 잘못을 보고한 내용이 확인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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