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존 스트롱맨 밴드' 리더 박만 씨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쓸어넘겨 묶고, 오른눈 밑에는 반창고 하나를 붙이고 있었다. 갈색 톤의 뿔테 안경을 끼고 체크패턴의 외투를 걸친 채 김이 서린 유리컵을 내왔다. 밴드들이 공연하는 곳이라 한낮에도 내부는 컴컴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전 그가 테이블 위 전등을 만졌다. 조금 환해진 조명 아래에서 로큰롤 밴드인 '존 스트롱맨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박만(32·사진) 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10월 첫 앨범을 냈다. 언론은 창원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가 앨범을 발매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며 소식을 전했다. '나팔바지와 구레나룻은 없었지만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의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 이날은 존 스트롱맨 밴드 첫 앨범발매 기념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지난해 10월 23일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기사 일부다.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안 된 지난 17일 그를 찾았다. 앨범발매 직후 직장을 그만두고, 창원대 정문 앞에서 라이브클럽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은 차였다.

박 씨는 창원 사람이다. 창원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시작한 일은 영업 쪽이었다. 차를 타고 다니며 외부활동을 했다. 주 활동지는 부산이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이라는 공식 속에 살고 있었다.

음악은 그에게 공기다. 굳이 인식하지 않는 존재다. 어렸을 때부터 흥얼거리며 곡을 썼고 문득 떠오르는 낱말과 문장은 가사가 됐다. 대학에서는 민중가요 노래패 활동도 했다. 그리고 자작곡 5곡으로 앨범을 냈다.

   

"돈도 안 되는 앨범을 왜 냈느냐고 묻는데, 왜는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 콘텐츠(노래)가 쌓이면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자신감이 생긴 거죠.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고 회사를 관뒀어요. 음원 수익이 전혀 없지만 돈벌이를 위한 직장에 가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가게를 차렸죠. 창원시 규모에도 음악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공연할 곳이 없잖아요. 밴드가 설 수 있는 라이브클럽을 열었죠. 수익도 나면 좋고요."

그의 음성은 예상보다 낮았다. 존 스트롱맨 밴드 앨범 〈끈적끈적한 로맨스〉는 현대인의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로큰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노골적인 가사와 함께 들리는 신나는 목소리는 흥을 돋운다. 하지만 중저음이다.

"감기에 걸렸거든요. 최근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대요.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라 신중하게 대답하느라고요."

박 씨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라이브카페 준비로 몸이 녹초가 됐고 대상포진 증세로 얼굴에 붉은 반점이 나타났단다. 반창고로 가리고 안경을 쓴 그였다.

"노래도 연기라고 생각해요.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이죠. 이번 앨범 콘셉트는 사랑과 정력이라서 목소리가 들떠있죠.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며 자극적이고 직설적으로 말하죠. 어느 팬이 저의 '사랑관'이라고 묻기도 해요. 그건 아니고요. 신자유주의 속 물질적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음 앨범 속 목소리는 또 다를 수 있죠."

그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음악에 대해 낙제점을 매겼다. 광고와 예능 등 엔터테인먼트와 결합해야만 살아남는 비정상적인 음악 시장에서 지역 인디밴드로 활동하는 것은 아주 큰 도전이자 시련이지만, 세상에 무관심한 청춘에 화두를 던지고 싶다고 했다. 시대가 흘러도 기념되는 노래를 하고 싶다. 연예인이 아니라 가수가 되고 싶다.

박 씨는 1년마다 앨범을 내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여자 드러머 냐냐와 키보드와 베이스연주자이면서 EP 녹음과 엔지니어까지 담당해줄 박동현 씨와 결성한 밴드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32살에 막 접어든 박 씨, 훗날 자서전을 쓴다면 오늘을 '남과 비교하며 남처럼 살다 자유롭게 온전하게 내길을 갔다'라고 적을 거란다.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나를 위한 자유를 찾은 것 같다고 말하는 박만 씨, 그가 궁금하다면 존 스트롱맨 밴드의 로큰롤에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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