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오죽하면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눌 때 전쟁 기간과 전쟁 준비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까. 시작은 대부분 정치적 이유였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가리켜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의 연속'이며 '정치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실질적 정치 도구로서 정치적 거래의 연속'이라고 했다. 흔히 정치를 인간세계에 상존하는 온갖 갈등 조정 행위라 하고, 그 조정에 실패한 세력들이 무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게 곧 전쟁이니 매우 타당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 대한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불가피하다는 사람부터 절대 불가하다는 이들까지 그 폭이 매우 넓다. 가장 '과격한' 사람들은 평화주의자들. 그 어떤 무력 사용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 다수는 국가 간의 모든 적대성을 폐기해 국가연방을 구축한 뒤 영구 평화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는 칸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왔다. 이를테면 일본 헌법 9조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영구히 방기한다"는 대목이 바로 그런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 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위일 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대로 비록 일본 헌법이 칸트를 숭배하는 누군가에 의해 입안되고 관철됐지만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으로 이미 흠집이 생긴 데다 최근 그 조항을 없애지 못해 안달인 아베와 우파 진영으로부터 볼 수 있듯 전쟁에 대한 야욕을 인간과 정치의 본성에서 근본적으로 없애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 이유로 보다 현실적인 논의들이 있었다. 이른바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이 대표적이다. 전쟁을 합리화하자는 게 아니라 선제 공격에 대한 대응처럼 불가피한 무력 사용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엄격한 기준을 정한 뒤 그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경우에만 정당성을 부여하자는 이론이다. 생소하겠지만 그 역사는 꽤 깊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철학의 거목 마이클 월저가 그 내용을 현대적으로 집대성했는데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어떤 전쟁도 정당한 명분 없이 시작돼선 안 된다. 그리고 반드시 정통성을 갖춘 권력 집단, 즉 합법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고 선한 의지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더불어 선량한 시민들이 희생양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반드시 일정 부분 이상의 성공 확률이 전제되어야 하며,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기대 이익이 적이 끼친 해악보다 크지 않아야 한다. 끝으로 그 어떤 경우라도 무력 행사는 평화적인 수단을 모두 강구해 본 뒤 마지막으로 행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최근 영국에선 이라크 참전을 결정했던 토니 블레어와 고위 각료들을 전범 재판소에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다수의 반대에도 부당한 전쟁에 가담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우익 세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며 평화헌법 개정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 땅에선 세상 그 누구도 정당한 전쟁이라고 말하지 않는 베트남 전쟁 참전 5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무리 박사 위에 여사, 여사 위에 육사가 군림하는 시대가 다시 왔다 해도 반드시 재고해야 할 일이다. 기념이 아니라 추모와 반성이 우선이다. 그게 상식이며 예의다.

/김갑수(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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