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시골 소년이 110만 메가시티 수장이 된 비결

박완수(朴完洙). 1955년 8월 10일생. 실제로는 1954년 음력 8월 26일생. 내년이면 만 60세가 된다. 2004년 지방선거에서 창원시장으로 당선된 이래 10년째 세 번의 시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3선 연임 제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름은 같은 창원시이지만, 2010년 7월 1일 마산과 창원, 진해가 통합되어 새로운 창원시가 출범했기 때문에 지금의 임기는 1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그의 행보를 보면 다시 창원시장에 나올 것 같진 않다. 경남도지사 출마에 마음을 굳혔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통영의 한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고구마와 칼국수를 주식으로 삼던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렵사리 초․중학교를 거쳐 공업고등학교를 나왔고,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 동경전자에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던 중 대학에 진학,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경남에서 가장 성공한 공무원 출신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어린 시절 공부도 별로 잘 하지 못했고,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는 시골 소년이 자라 인구 110만의 메가시티 창원의 행정 수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시장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쯤 그의 삶과 꿈을 기록해놓고 싶었다.

박완수 창원시장./박일호 기자

고구마와 칼국수가 주식이었던 시골 소년

-요즘도 고구마를 특히 좋아하신다더군요, 고구마 주산지는 통영 미륵도가 많이 알려져 있는데, 도산면에서도 고구마 농사를 많이 했나요?

“밭에는 모두 고구마였어요. 내 생일이 음력 8월 26일인데 새 고구마를 파서 쌀 위에 얹어 밥을 해줬어요. 내가 어릴 때 가장 많이 먹었던 게 빼때기(절편 고구마)와 고구마, 그리고 칼국수였는데, 칼국수에 질려서 지금도 중국집이나 면 음식을 잘 안 먹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구마는 지금도 맛있게 잘 먹어요. 지금도 고구마를 박스로 사와서 항상 먹죠.”

-예전에 <원칙과 희망이 있는 사회>라는 책을 쓰신 적이 있던데, 구하기가 어렵더군요. 혹시 남은 책이 없나요?

“그건 2002년도 무소속으로 창원시장 출마하기 전에 낸 책인데, 내 생각이 제목에 반영되었죠. 살아온 과정과 공무원 재직 과정에서 느낀 것들,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묶은 책이죠. 여분이 있으니 한 권 드리죠.”

그렇게 하여 얻은 책을 보니 초판은 2002년 3월에 발행됐고, 2003년 10월 개정판도 나왔던 책이었다. 도서출판 경남, 6000원.

그는 통영시 도산면 도선리 신평마을 출신이다. 2남 3녀 중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태어났으니 사실상 막내다. 그의 아버지는 여섯 마지기의 논으로 5남매를 키웠다. 당연히 가난했다. 그래서 밥보다는 고구마나 빼때기, 그리고 배급되는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를 더 많이 먹었다.

도원초등학교 시절에는 산에 가서 나무하고 농사일 거드느라 공부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중학교도 등록금이 모자라 남들보다 2개월 늦게 고성 철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적어도 중학교 때까진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가는 고성중학교로 가지 않고 철성중학교로 간 것은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고요?

“고성중학교 시험에 합격은 했는데, 등록금 5800원이 없어서 등록을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학교 다니는데, 나는 3~4월 농사일만 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보기에 안 됐는지 저보다 열아홉 살 많은 형님을 불러 ‘네 동생 중학교는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네가 좀 알아봐라’고 하셨어요. 형님은 고성농고를 나오셨는데 형님의 농고 한 해 선배인 철성중학교 교무주임 선생님이 있었어요. 지금도 살아계신 분인데, 그 분이 ‘지금이라도 입학을 시켜주겠다. 등록금은 3000원인데 책은 헌 책을 쓰고 1500원만 내면 된다’고 해서 들어간 거죠.”

-시장님이 공부에 그렇게 매진하여 행정고시까지 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사람은 따로 없었나요? 집안에 특별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었다든지….

“머리가 좋다기보다…. 음, 나도 공고 나와서 동경전자에 취직하여 근무 중 방송통신대를 거쳐 경남대에 3학년으로 편입했고, 대학원도 나오고 행정고시 합격도 했는데, 우리 큰 아이도 행정고시 합격을 했죠. 그리고 나와 쌍둥이인 여동생이 있어요. 그 애도 중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그 딸이 마산 성지여고 1등으로 졸업해서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어요. 그 애도 재경직 행정고시에 합격해 기획재정부에 근무하고 있죠.”

마산공고 3학년 시절.

-아,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군요. 이란성 쌍둥이. 2남 3녀인데, 형님과 열아홉이나 차이가 나고, 그 아래 누나 둘과 쌍둥이 여동생이군요.

“그래서 제가 막내나 마찬가지였죠. (웃으며) 어릴 때 내가 여동생과 쌍둥이란 소릴 듣기 싫어서 일부러 학교를 한 해 빨리 가겠다고 했어요. 내가 자원해서…. 그래서 한 살 먼저 일곱 살에 입학했죠.”

-대개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부모가 아니더라도 친지들 중에서 롤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 있어서 특정분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요. 시장님은 전혀 그런 영향을 받을만한 분이 없었나요?

“그런 사람이 없네요. 사실 우리사회가 연고주의 사회고 연줄이 중요한데, 지연도 별로 없었고 혈연도 우리 집안에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안 계셨고, 학연도 시골 중학교와 공고 뭐 그러니까….”

-시장님은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나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공부를 잘한 기억이 없어요. 산에 나무하러 다니기 바쁠 때였으니까 공부할 시간도 없었죠. 고등학교(마산공고) 때 지금 용마고등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어요. 그 때 집에서 쌀을 가져다 먹는데, 한 번은 아버지가 쌀을 가져온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버스 안에서 쌀자루가 터진 모양이에요. 버스 안에 흩어진 쌀을 손으로 쓸어 담아 멜빵을 하여 가지고 왔더라고. 당시 통영에서 마산 오는 길이 비포장 길이라 차가 덜컹거리니까 쌀자루가 터졌던 거죠. 그래서 쌀에 흙먼지가 뒤범벅이 되어있었는데, 체면도 가리지 않고 그 쌀을 손으로 주워 담았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좋아하시는 막걸리 한 병이라도 사드리려고 하니까 손사래를 치시며 찬 물 한 사발만 마시고 바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그 때부터 공부를 많이 해서 2학년, 3학년 때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죠. 그 전까지는 성적도 중간 정도였지 잘 한다고 할 순 없었어요.”

돈도, ‘빽’도 없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1972년도에 졸업을 하고 바로 동경전자에 취업하게 된 건가요?

“내가 장학금도 받고 공부를 잘했는데도 취직이 잘 안 되었어요. 그래서 통영 집에 가 있었어요. 그 때 제가 아버지에게 말했죠. ‘제가 6월까지 농사를 지을 테니까 학원을 보내달라. 대학을 가야겠다’라고. 그렇게 약속을 받아놓고 6월 말까지 모내기를 다 끝내고 부산으로 갔죠. 아버지도 약속을 해놓고 안 보내줄 수 없으니까.(웃음) 그래서 부산 서면학원 종합반에 들었어요. 그 때 등록금이 7500원이었는데, 종합반에 열이틀 다니고 7월 12일이 되니까 아버지가 왔어요. 엽서를 하나 내놓는데 보니까 수출자유지역에서 시험 치라고 엽서를 보낸 거야. 고등학교 3학년 때 막 자유지역이 조성되고 있었는데, 그 때 자유지역 관리원에다 모두들 원서를 내놨던 게 동경전자로 가서 그렇게 엽서가 오게 된 거죠. 그런데 나는 안 간다고 했지. 대학 가야하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시험이라도 쳐봐라. 안 가도 되니까’하고 설득했죠. 거기에 꼬여 가지고 와서 시험을 쳤는데 합격을 하는 바람에 7월 20일 바로 출근을 했잖아요. 그 바람에 학원 등록금 내놓은 것도 내버리고….”

-동경전자에선 관리직이었나요?

“아니, 생산직이었죠. 컨베이어벨트 작업시스템인데, 우리는 수리사로 갔어요. 컨베이어에서공정을 거친 제품이 테스트를 거쳐 불량으로 나오면 그걸 고치는 작업이죠.”

-그 당시 동경전자라면 좋은 직장 축에 속했나요?

“우리 친구들이 한일합섬에도 많이 갔는데, 72년 당시 월급이 1만 4000원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초임을 2만 원 받았으니 굉장히 좋았지. 고졸로서는 보수가 높았던 편이었죠.”

-거기 다니면서 방송통신대에 진학하신 건가요?

“2년 정도 다니던 74년도 초에 우리 친구가 원서를 두 장 사왔어요. 방송통신대 원서더라고. 나는 그런 대학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자기는 경영학과 갈 건데, 너는 무슨 과 갈래? 하고 묻는 거예요. ‘무슨 과가 있는데?’ 물었더니 농학과, 경영학과, 행정학과 이런 게 있다는 거야. 당장 행정학과에 간다고 했죠. 회사 다니면서 라디오 강의 듣고 부산 가서 열흘 동안 출석수업 받고…. 내가 그래서 74학번인데 75년도 11월에 편입 검정고시를 쳐서 경남대 행정학과에 진학하게 됐죠. 원래 나는 영남대에 가고 싶었는데 시기를 놓쳐버렸어요.”

박완수 창원시장./박일호 기자

-서슴없이 행정학과를 선택했는데, 그건 왜 그랬을까요?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가 관리(공무원)에 대한 바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글자를 모르는 분이고 전형적인 농민이었으니까 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그것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경남대 편입할 때 집에서 반대를 많이 했다던데요?

“그랬죠. 동경전자를 그만둬야 하니까. 대학 나와도 그런 회사 못 들어가는데 왜 그만두려 하냐는 거였죠. 동경전자 스타트 멤버였으니까 그 때 이미 반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여자 직원들이 서른 명쯤 있는 라인에 반장이었으니까 월급도 많이 올랐고…. 그 당시에 일본인 회사라면 좋은 회사였으니까. 그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직금을 받아서 경남대 3학년 등록금을 냈죠. 그게 76년 3월이었어요.”

-동경전자를 그만두고 경남대 편입할 때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어린 마음이지만, 당시 회사 안에서도 대학졸업자와 고졸자의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 회사에 다니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죠. 되돌아보면 그 때 그 결정이 제 인생에서 큰 도전이었죠.”

-그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것과 함께 김해부시장하다 그만두고 (창원시장에) 출마했던 것. 그게 정치판으로 나를 끌고 왔는데, 잘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 번이 큰 도전이었죠.”

-그 비슷한 시기에 양자로 입양되는 과정이 있었죠?

“입양된 것은 그 이전 71년도였을 거예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73년도로 나오는 것 같던데요?

“아마 그것은 호적정리가 73년도에 되었다는 걸 거예요. 실제 내가 입양된 것은 열여덟 살 때 71년도일 겁니다. 그건 우리 오촌 아저씨, 바로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두 분 다 술을 좋아하시다 보니 술 자리에서 ‘나는 자식이 없는데 완수 그냥 저 주이소’ 해싸니까…. 아버지는 생각도 좀 있었겠지. 혹시 자식 도움이라도 좀 받을까 하는…. 그래가지고 의논해서 양자로 보낸 거죠.”

좋은 직장을 버리고 행정고시에 도전하다

-경남대는 79년도에 졸업하게 되던데….

“76년도에 들어가서 한 해 마치고 공무원 시험을 쳤어요. 지금 7급에 해당하는 4급 을류를 9월에 합격했어요. 그래서 마산시청에 가니까 임용을 안 해주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서 77년도에 제가 방위를 섰어요. 그러고 나서 78년도에 4학년 복학을 했죠. 그 때도 대학생이니까 마치고 오라며 임용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차라리 행정고시를 하자며 공부를 시작했죠. 그 해 10월 22회 행시에 공민배(전 창원시장)가 합격할 때였는데, 나는 1차는 합격하고 2차는 떨어졌어요. 그런데 1차 합격자는 이듬해 2차에 한 번 더 응시할 기회를 줬거든요. 그 때 마침 경남대 대학원에서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입학을 시켜줬기 때문에 진학할 수 있었고, 1년 뒤 합격할 수 있었죠.”

-그 때 본인 스스로 내가 공부에 좀 재주가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나요?

“1차 합격하고, 2차에서 0.2점 차로 떨어지니까 조금만 더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공부를 잘 한다기보다는 강한 욕구가 있었죠.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없고 내 앞길도 없다는…. 그래서 막판에 워낙 신경을 많이 써가지고 불면증에 걸려 공부를 못할 정도였어요. 스트레스가 많았죠.”

박완수 창원시장./박일호 기자

-고시 공부를 도서관에서 했나요?

“4학년 때까지는 도서관에서 했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경남대 앞 장학사에서 하다가, 마지막 서너 달 동안은 시골에 가서 혼자 했어요. 숙모님 혼자 사는 옆집이 있었는데 거기 작은 골방에서…. 그 때 박재완(전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 장관) 장관이 (고성) 옥천사에 공부하고 있었는데 오라고 해서 갔다가 열흘 만에 나와 버렸어요. 거기선 공부가 안 되더라고. 맨날 관광객들 오지, 함께 산에 놀러 다니지, 그러니까 안 되겠더라고.”

-박재완 장관과는 그 때 이미 알던 사이였나요?

“내가 대학 4학년 때 박 장관은 이미 졸업을 했을 거예요. 정상적으로 진학을 했으니까. 내가 4학년 때 박재완․공민배가 경남대 도서관에 공부하러 왔어요. 그래서 알게 됐고 그 뒤에 친해졌고….”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84년도니까 내가 행시 합격하고 2~3년 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3년 전에 90세 훨씬 넘어서 돌아가셨죠.”

-아버지가 행시 합격했을 때 엄청 좋아하셨겠네요?

“부모님이 다 좋아하셨죠.”

-어머니는 아들이 창원시장까지 하는 걸 보고 돌아가셨으니 효도하셨네요.

“합천군수할 때도 어머니 모시고 합천에 있었죠.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뭘 아셨는지 어머니에게 ‘너는 나보다 복이 많을 거다’고 늘 말씀하셨어요.(웃음)”

-79년 행시 합격 후 첫 발령이 경남도청이었나요?

“수습 마치고 각 부서를 써낼 때 내무부로 냈어요.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도 그 때 같이 내무부 신청을 했죠. 그런데 당시 내부무는 본부에 발령내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지방에 내려가도록 했어요. 지방사무관으로 각 시도로…. 그래서 경남도가 부산 있을 때 왔는데, 내가 빽도 없고 이야기를 안 하니까 일년 반 동안 무보직으로 놔두더라고. 그 때 아마 대기 사무관으로 가장 오래 있었죠. 그 후 교민계장이라고 교포들 지원하는 보직을 얻었죠.”

-그 후에는?

“그 후 공무원교육원으로 또 쫓겨 갔어요. 내가 집사람과 결혼을 하고 나서 집사람이 제일여고 교사로 다니니까 마산시청 옆에 집을 얻었는데, 도청이 부산에 있으니까 거기서 차를 여섯 번 타야 도청까지 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몇 년 후 83년 도청이 창원으로 옮겨왔죠. 그래서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오자마자 부산에 있는 공무원교육원으로 발령을 내버리는 거예요. 그 때 도 본청에 있다가 교육원으로 가는 사례가 없었어요. 보통 군청에서 교육원으로 갔다가 본청으로 들어오는데…. 그래서 또 교육원에 2년 가까이 있었죠.”

-그 때 누가 도지사였나요?

“이규호 지사였죠. 그 후 농산계장으로 들어와서 지역경제계장하다가 사회계장하고…. 내가 계장 때는 좋은 자리에 못 가봤어요. 사회계장하던 중 승진했죠. 과장되고 또 공무원교육원에 가서 2년 6개월 더 있었어요.”

김혁규 도지사에게 인정받은 ‘4인방’

-과장(4급) 승진할 땐 도지사가 누구였죠?

“조익래 지사 때였죠. 그 때 내무국장이 꼿꼿한 분이었는데, 그 분이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서열이 빠르니까 승진을 시켜줬어요. 승진 후 공무원교육원에 있을 땐 최일홍 지사 시절이었는데, 그 후 법무담당관으로 들어왔어요. 그 때부터 초스피드로 달렸죠. 그 땐 1년 단위로 법무담당관, 경제과장, 감사과장, 지방과장 이렇게 거쳤죠.”

-제가 도청 출입하면서 시장님을 만난 게 아마 감사담당관과 지방과장 할 때였을 겁니다. 그 당시 도청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중 한 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인정받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김혁규 지사가 오기 전 윤한도 지사 시절에 감사담당관을 했는데 사정작업도 하고 재산등록 실사도 하고 그랬죠. 당시 군수 자리가 많이 비기에 나는 군수로 나갈 줄 알았죠. 그런데 나보다 고참 선배들이 있어서 군수로 못 나가고 12월 28일 도지사가 딱 바뀌는 거예요. 김혁규 지사가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1월 2일 관사로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도정에 대해 의논을 하겠다며 부르는 거였죠. 그래서 도정이 이렇게 가야 한다는 보고서를 여섯 장 정도 만들어갔죠. 김혁규 지사를 처음 뵙는 자리였는데 나와 둘이 앉아서 두 시간이나 브리핑을 했어요. 마치고 나오니까 당시 김해군수였던 이덕영 부지사가 들어오더라고요. 아무튼 그 때 전수식을 단장으로 하는 도정발전기획단이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다 내가 드린 보고서를 던져주면서 ‘이걸 참고하라’고 한 거죠. 그렇게 1월 2일 김혁규 지사를 만났는데, 1월 4일 지방과장으로 발령이 났죠. 아마도 김 지사가 청와대에 있을 때 경남도청의 일꾼들에 대한 정보를 나름대로 갖고 온 것 같아요.”

박완수 창원시장./박일호 기자

-그 때 일꾼 4인방이라는 말도 있었잖아요. 박완수, 전수식 그리고….

“이덕영, 박우식이라고 나이 많으신 분인데 비서실장을 했죠.”

-김혁규 도지사 때부터 공직생활이 핀 거로군요.

“김혁규 지사가 역대 도지사들 중 가장 합리적이고 좋더라고. 아, 이 도지사가 있을 때 정말 열심히 해봐야겠다 생각했죠. 도지사도 서울이나 시․군에 갈 때 국장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나를 데리고 다녔어요. 페놀사태가 터졌을 때 4개 시․도지사가 칠서에 모여서 물 마셨잖아요. 그걸 내가 아이디어 낸 거예요. 그리고 울산이 떨어져나갈 때 도의회에서 김 지사가 굉장히 코너에 몰렸는데, 내가 드린 스피치를 읽고 도의회가 조용해졌죠. 제가 가장 열심히 일했던 시절이었죠. 그 후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995년) 민선시대가 열렸는데 임명직 시장․군수 자리가 없어지니 그들이 모두 도정발전기획단에 들어와 있었죠. 갈 데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 때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7월 1일 민선으로 김혁규 도지사가 당선되고 그해 10월에 농정국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고시 출신 40대 초반의 젊은 과장이 국장으로 승진한 거죠. 그 때부터 농산물 수출 때문에 고생했고, 지역경제국장으로도 진짜 열심히 했죠.”

-군수는 합천군수 한 군데 하고 바로 민선시대가 됐죠? 도청에서 국장할 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역경제국장 할 때 제일 열심히 했는데, 경제국장 3년을 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 때 97년 말에 IMF사태가 왔는데, 저는 97년 3월부터 경제 살리기를 했죠. 당시 열네 개 시책 중 기업을 살리기 위해 공무원이 기업체 방문을 하지 말자는 게 있었는데, 조선일보가 ‘경남도의 해괴한 방침’이라는 제목으로 비판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죠. 두 번째는 외자 유치 사업을 했는데, 사천에 태양유전을 유치해 한국 제1호 자유무역지역을 만들었죠.”

합천군수 시절 가야산 정상.

-저서 <원칙과 희망이 있는 사회>에도 그렇고, 2012년에 낸 <명품도시의 창조>(매일경제신문사)에도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던데, 그런 생각이 그럼 그 때 형성된 건가요?

“그렇죠. 지역경제국장할 때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죠.”

-당시 아쉬웠던 기억도 있을 법 한데.

“이후 김해부시장으로 갔는데, 나는 지금도 우리 공무원들이 선거에 관여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때 김혁규 도지사와 조금 갈등이 있었어요. 1998년 지방선거 때 나는 선거판에 일체 가지 않았어요. 그 때 새정치국민회의 강신화 후보와 대결이었는데, 가만히 놔둬도 되는 선거였거든요. 괜히 공무원이 가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좀 섭섭했던가 봐요.”

-그래서 김해부시장으로 갔군요. 그런데 그게 결과적으로 보면 전화위복이 되지 않았나요?

“그렇죠. 뭔가 풍족하면 욕구가 안 생기죠. 어려울 때 강한 욕망이 생기는 것이고. 나는 사실 정치인 스타일이나 기질은 아닌데, 운명인 것 같아요.”

김해부시장을 버리고 도전했지만…

-그래서 2002년 지방선거에 과감하게 부시장직을 버리고 출마했잖아요.

“나도 그 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임명직 공무원으로 종이 한 장에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도 내가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지역 경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사퇴할 때 나이가 마흔아홉인가 그랬는데 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죠. 그래서 가족들을 불러 물어왔죠. 집사람은 아무 말 않는데, 큰 놈이 ‘엄마, 아버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세요’ 이러더라고.”

-결혼을 좀 늦게 하신 편인가요?

“내가 스물여덟, 집사람이 스물다섯에 했으니 늦은 편도 아니었죠. 1981년.”

-부인(차경애 여사)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대학 다닐 때 집사람이 학보사 만화를 그리고 있어서 나는 알고 있었죠. 이후 졸업하고 행시 합격 후 집사람도 제일여고 다닐 때, 둘이를 잘 아는 사람이 소개를 해줬어요. 그래서 1년 정도 사귀다가 결혼했죠.”

-어떤 점이 마음에 끌렸나요? 예뻐서?

“집사람이 예쁜 스타일은 아니고(웃음) 외모는 평범한데, 우리 집사람이 경남대 수석 졸업했어요. 국어교육과 출신인데, 그래서 제일여고에 들어갈 수 있었죠. 또 장인어른이 평생 교직에 있다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분이고 처남들 처수들도 다 교사였어요. 내가 볼 때 무난한 집안이고 무난한 사람이었죠.”

밀양 사자봉에서 부인과 찍은 사진.

-부인은 언제까지 교직에 있었나요?

“그게 안타까운 게 1994년 합천군수로 나갈 때 집사람이 17년을 하고 그만뒀어요. 3년만 더 했으면 연금도 받고 할텐데….(웃음) 아이들도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7개월밖에 있지 않을 합천으로 가면서 전학까지 다 시켰어요. 지금도 그게 후회가 돼요.”

-그 때 왜 그만뒀나요?

“도지사도 그만두라 하고, 나도 그 땐 순수한 생각으로 군수를 맡았으면 가족 모두가 거기로 옮겨가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면 좀 어리석었지만….”

-큰 아들(찬효․32)도 역시 행정고시 합격하여 공직에 있죠?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기획재정부에 있다가 유학 가겠다며 휴직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어려운 길로 가려느냐고 했는데, 이 놈도 어떻게 된 판인지 계속 공부만 하려고 그래요.”

고성 당항포서 찍은 가족사진.

-2002년 창원시장 선거에서 낙선하셨잖아요. 그 때 좌절이 깊었나요?

“아휴, 깊었죠. 왜 그랬냐면, 내가 1월 말에 김해부시장 사표를 냈는데, 바로 선거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 때까진 22년 공직에서 사퇴했다는 게 실감이 안 났죠. 공천 받으려 뛰어다니다 결국 무소속으로 출마해 6월 선거에서 막상 떨어지니까 그 때서야 낙선과 공직 사퇴가 실감이 났어요. 나는 괜찮은데 가족이나 주위사람이 견디기 어려웠죠. 평생 살아오면서 하늘이 노랗다고 할까 그런 걸 처음 느꼈어요. 그 후 9월부터 경남대에서 강의를 한 과목 맡았고, 다음해 신학기에는 가야대 행정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죠.”

-그 때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뭐였을까요?

“좌절의 기간이 길었죠. 그래도 선출직의 꿈을 놓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시장을 할 것이라는 강한 집념이 있었고, 그래서 계속 그걸 염두에 두고 노력을 했죠.”

2014년 새로운 도전이 주목되는 까닭

-그렇게 해서 2004년부터 창원시장을 맡아오셨는데, 10년 동안 세 번이잖아요. 10년이면 좀 지겹지 않나요?

“어느 국회의원이 저더러 그러더라고요. 기초자치단체장을 10년 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그만큼 피곤한 일을 왜 그렇게 오래하느냐는 뜻이 묻어 있는 말인데, 나도 참 피곤하죠. 특히 통합되고 나서 더 피곤해요. 앞으로 내가 더 하든, 다른 사람이 맡든 정말 이거 쉬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타고난 성격이 어쨌든 맡은 일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고, 나에게 주어진 본분과 책임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완수 창원시장./박일호 기자

-내년에 다시 창원시장에 나오진 않을 것 같은데요.

“곧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도지사로 가든 시장을 하든 가부간 결정을 할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경남이 지금 가고 있는 모습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경남에서 평생 살아왔고 앞으로도 경남에서 평생 살아가야 할 사람이고, 경남을 많이 알고 그만큼 애정도 많잖아요. 그래서 내가 경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나에게 좀 고난스러운 길이라도 마다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시 도지사에 출마하게 된다면 자신은 있습니까?

“해내야죠. 내 개인의 정치적 앞길을 위해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왜 해야 한다는 목적과 당위성을 확실히 갖고 가기 때문에 시민과 도민들이 내 생각에 동의하고 힘을 실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민이 힘을 실어주면 성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박완수가 해야 합니까?

“내가 경남에서 태어나 살아왔고 평생 애정을 갖고 공직생활을 해온 사람으로서 현재 최근 몇 년 동안 경남이 가고 있는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경남이 제대로 더 멋지게 발전할 수 있도록 내 역할이 있다면 내가 좀 피곤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홍준표 도지사 취임 이후 제일 큰 이슈가 진주의료원이었는데, 만일 시장님이었다면 진주의료원 문제를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진주의료원은 서민 의료서비스를 위해 설치한 기관인데, 그것이 운영상의 문제가 있다고 하면 문제 있는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 1차적인 과제이지, 문제가 있다고 해서 폐쇄를 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행정이라는 것은 항상 흑자만 갖고 이야기할 순 없는 거죠. 이게 사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행정은 경영이나 관리 측면에서는 민간부문과 같지만, 행정은 공익적인 목적이 우선되어야 하거든요. 공익이 비용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면 적자도 감수해야 하는 거죠. 보건소가 그러면 적자 난다고 문 닫으면 되나요?”

-창원시장으로 재임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정책이나 성과를 꼽는다면?

“기업사랑운동과 환경수도운동이죠. 그게 박완수의 브랜드라고 할만한 일이죠. 우리 시가 시작해서 중앙정부도 수용하고 전국에 파급이 되었죠. 네이버 지식백과에 ‘기업사랑운동’이 창원시에서 시작되었다고 정의가 되어 있어요. 이것이 반(反)기업 정서를 해소하고 지역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죠. 환경수도운동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국제적으로도 인정해주고 있고…. 누비자도 거기에 포함되죠.”

 -마창진 통합 후 청사 문제와 야구장 문제 등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마산 쪽의 소외감을 해소할 방안이 있을까요?

“저희들의 제일 큰 고민이고, 창원시정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가 그거죠. 그런데 이건 시장이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 지역의 정치 지도자들이 다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어떤 대안을 냈다고 해도 우리 시민들이나 이 지역의 지도자들이 수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시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시청을 분할한다든지, 합포청사와 창원청사로 분할한다든지 아니면 마산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발전계획을 내놓는다든지 그런 일들인데, 그 부분은 제 임기가 다할 때까지 고민할 것이고, 계속 대안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단지 그것을 수용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 또 지역의 지도자들이 함께 뜻을 모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거죠.”

박완수 창원시장./박일호 기자

-합포구청을 제2청사로 한다 하더라도 그건 의회 승인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나요?

“지금 청사 소재지에 대한 조례는 창원시 시청 소재지는 의창구 몇 번지로 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건 주된 사무소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일부 사무소 사업소들이 지금도 밖에 나가 있잖아요. 지금 창원청사 사무실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 관할 안에 분산 배치하는 것은 시장의 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장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만일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시급히 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래서 마산 쪽의 정치인들에게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걸 잘 수용을 않으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민하고 있는 거죠.”

-살아오시면서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책이 있다면?

“어릴 때 삼국지를 여섯 번이나 읽었어요. 제가 책 읽는 걸 좋아했죠. 제 성격의 특징이라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하고, 두 번째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거죠. 말 보다는 어릴 때부터 상상을 많이 했어요. 말이 적은 성격이었죠. 제가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부모님이 막내아들에게 기대를 많이 했나요?

“기대를 많이 했다기보다 사랑을 많이 주셨죠. 특히 어머니가 그랬는데 어머니가 내 초등학교 4학년 때 차 사고를 당해서 한쪽 다리에 의족을 끼고 계셨는데, 그래서 농사 일을 못하니까 내가 고등학교 마치고 수출자유지역 다닐 때, 그리고 대학 다닐 때, 그리고 합천군수할 때까지 우리 집에 함께 계셨어요. 총각시절부터…. 어머니는 한결같이 나에 대해서 기도해주셨고 모든 걸 나에게 바치신 분이죠.”

-시간 있을 때 즐기는 일은.

“옛날엔 책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등산하고 걷는 걸 좋아합니다. 경남도에 있을 때는 얼마나 등산을 좋아했는지 토, 일요일마다 다녀서 우리 애가 뭐라 하냐면 자기는 초등학교 다닐 때 이 세상의 아이들은 토, 일요일만 되면 모두 부모님과 산에 가는 건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으니….(웃음)”

-아이들과 같이 다녔군요. 아이들에 대한 교육관이 있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이들 어릴 때 집사람하고 다툰 게 그 문제 때문이었죠. 아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사람은 다 자신의 길이 있기 때문에…. 학부모 대상 강의할 때도 그 얘기를 많이 하는데, 애를 자꾸 만들려고 하지 말고 애가 무슨 재능을 갖고 있는지 그걸 파악해서 그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고 코치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보거든요.”

인터뷰 결과 그의 성공 비결은 ‘하나를 얻기 위해 이미 가진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었다. 다들 선망하던 동경전자라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경남대에 편입하고, 이른바 ‘철밥통’이라는 안정된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선거에 출마한 일이 그랬다. 그래서 잠시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더 큰 것을 성취했다. ‘버리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아포리즘이 그에겐 들어맞았던 셈이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 지금, 그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지 주목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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