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우유 배달원 한명원 씨

시멘트 벽돌로 지어진 낡고 허름한 건물 안.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창문과 출입구 위아래를 온전히 채우지 못한 쇠문 사이로 얼음장 같은 바람이 몰아친다.

냉기를 머금은 바닥은 신발 속 발마저 얼려버렸다. 장갑을 몇 겹씩 낀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만드는 차디찬 기온. 하지만 이마와 목에서는 뜨끈한 열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흐트러진 우유와 요구르트를 정리하고, 바닥에 뒹구는 빈 상자를 치우며 연신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허리를 펴고 깊은 숨을 몰아쉬던 그때, 사무실 구석에 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짧은 통화 후 끊은 전화기에 pm(밤) 10시가 선명하게 찍힌다.

"슈퍼에서 우유와 요구르트 떨어졌다고 하네요. 가서 팔린 제품이 뭔지 확인하고 필요한 양만큼 채워 넣어야죠." 냉동탑차에 급히 오르는 한명원(66) 씨는 진해 부산우유 대리점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다.

150cm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격. 꼭 삶의 무게에 짓눌린 듯 허리가 굽었지만, 우유와 요구르트 상자를 옮기는 손길은 야무지고 당차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거래명세서를 작성하는 눈빛에서 16년 경력의 관록이 느껴진다. 하지만 점심, 저녁을 도시락이나 라면으로 대충 때우는 모습에선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배어나온다. '귀찮고, 할 일이 많아서'라고 둘러대기에는 손과 얼굴에 팬 주름이 너무 깊다.

"26년 전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했는데, 큰 마트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장사가 잘 안되더라고요. 5~6년 정도 버티다가 접었죠. 당시 가게를 정리할때 쯤 평소 알고 지낸 요구르트배달 아줌마가 이쪽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하루도 쉬지 않고 우유 배달하는 명원 씨. 그가 맡은 구역에서 우유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기 힘들 정도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불편한 몸으로 경비 일을 하는 남편과 한창 공부할 시기였던 아들, 딸을 위해서라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우유 하나, 요구르트 하나라도 더 팔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냉동탑차에 몸을 실었다. 덕분에 자식 셋 대학 공부 다 시키고 시집, 장가도 보냈다.

엄마로서 할 노릇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평소 자동차를 개조하는 데 일가견 있던 큰아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렵고 힘들어도 자식의 꿈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싶은 게 어미 된 심정. 잘 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집을 담보로 대출받았다. 그러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5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집을 잃고 빚을 얻었다. 명원 씨는 다시 허리를 질끈 묶고 더 많이 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오직 우유, 요구르트를 파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죠. 우유 한 개를 주문해도 달려갔죠. 내가 맡은 구역에서 우유 없다는 소리 안 나오게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돌아다니죠. 특히 목욕탕 주인이 좋아해요. 유제품 소비가 많은 주말에도 냉장고에 팔 물량이 채워져 있으니 말이죠."

정기적으로 하루에 슈퍼 10여 곳과 한 달 평균 가정집 50여 곳에 유제품을 배달하는 명원 씨는 밤늦은 퇴근을 자청한다. 사실 유제품을 정리하고, 차에 실어 배달하는 노동의 무게는 일흔을 바라보는 여성이 감당하기에 실로 무겁기 그지없다. 40~50대 남성 직원이 다수인 이유이기도 하다.

   

일 처리 속도가 상대적으로 늦다 보니 자연스레 남들보다 덜 쉬고 더 움직일 수밖에. 점심, 저녁에도 행여 주문 전화 올까 봐 맡은 구역을 떠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일에만 매진했다.

그래도 힘들고 답답할 때가 왜 없으랴. 그럴 때면 평소 알고 지내던 할머니들을 찾는다. 한창 여가를 즐기는 '언니뻘' 할머니와 세상사를 이야기하면 고된 일상을 잠시 잊게 된다고.

"이제는 가족도 주변인도 말려요. 일 그만두고 좀 쉬라면서. 갈수록 부쩍 힘이 부치긴 해요. 그런데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온전히 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매년 올해까지만 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그만두려니 너무 아까운 거예요. 빚도 갚아 가고, 조금씩 희망을 품게 되었는데…. 우유는 단순한 유제품이 아닌 제 인생에서 은인 같은 존재예요."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즐겁고 재밌다고 말하는 명원 씨. 우유 배달을 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는 맛을 새삼 깨달았다. 배달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오며 가며 건네는 작은 인사에서, 웃으며 내미는 커피 한잔에서 우러나오는 정을 알게 됐다. 앞만 보며 달려온 그에게 소소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가진 거 없지만 크게 아쉬울 게 없다는 명원 씨에게도 꿈은 있다. 맛있는 음식 실컷 먹으면서 좋은 곳 마음껏 구경하며 다니는 것.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꿈인 것을, 명원 씨는 그마저 분에 겨운 바람인 듯 소녀처럼 수줍게 말한다. 언젠가 꼭 기차여행을 함께 가기로 약속해놓고 홀로 먼 길을 떠난 남편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도 함께 담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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