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탓을 하자면 아서 단토(미술평론가, 1924-2013) 탓이다. 그는 예술 작품이 해석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예술의 종말이 예술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예술사를 지배해온 거대 서사와 내러티브의 종말이라고 했다.

해석의 여지를 갖지 못하는 예술 작품은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다는 작품의 지위와 관련한 명쾌함은 미술의 문제가 단지 미술에 있지 않고 철학적 해석에 있다는 결론에 접근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영국의 미술가 데미언 허스트의 토막 낸 상어의 사체가 700만 파운드(약 140억 원)에 팔렸다는 외신에 경악했다.

단지 포름알데히드를 가득 채운 유리 상자 속에 상어 한 마리를 집어넣고는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아놓았을 뿐인데, '젊은 영국 미술'(young British artist)을 이끈 유명 컬렉터 찰스 사치가 이 작품을 1억 원에 사서 무려 139억 원을 남겼단다.

그뿐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해골은 920억 원에 팔렸다. 아~ 이때의 당혹감이란. 희귀한 문화재도 그렇게 비싸지 않은데 어떻게?

현대 미술의 상업적·자본적 성격의 제도들이 만들어낸 이 작품, 대량 소비 사회에서 유통되고 가공되는 예술품들, 미술이 아닌 것과 미술인 것의 구별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 미술가들의 예술 작품은 그들만의 욕망 배출인가? 아니면 깊이의 세계가 아니라 표면의 세계일 뿐인가? 이런 물음들에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예술 작품의 지위는 해석에서 비롯되며, 예술 작품으로서 권리가 박탈될 경우 그것은 해석의 여지를 갖지 못하는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 즉 예술 작품이란 해석을 부여받을 수 있는 대상임에 반해, 실제 사물은 이론화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단순한 사물일 뿐, 예술 작품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마치 어떤 규칙의 문구를 연상시키는 단토의 정의를 거들먹거린다.

모더니즘 이후 절대적 가치를 추구했던 미술은 이제 완전히 호소력을 잃어버렸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 미적 가치 변화와 다양한 표현은 이제 미술이 어디로 가는지, 미술가의 목표는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있다

허스트의 작품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미 개념보다 고통과 경악이 사용되었다. 많은 현대미술 작가가 이처럼 '센세이셔널리즘'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과연 이런 작품이 대중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허스트의 모터가 부착된 상어의 사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유영하고 있다. 죽음 끝에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동작들을 영위할 수 없음을 말한다.

미술의 종말! 죽음은 영원한 고별이자 침묵이기 때문이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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