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가장 빛났던 시기를 다룬 영화다. 혹자는 정치인 노무현이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영광의 순간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더구나 패배를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희생만큼 숭고한 것은 없다. 부산에서 돈벌이에만 목매 살던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과거 신세를 졌던 돼지국밥집 주인 아들이 군사독재 정부의 공안사건 조작에 휘말리자 고민 끝에 하던 일을 접고 변호를 시작한다.

만일 뜨겁게 살다 안타깝게 떠난 노무현이라는 안전판이 없었다면 '어느 날 갑자기' 소시민에서 민주 투사로 변신하는 또 하나의 영웅 탄생기에 우리는 쉬이 공감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노무현은 평소 그를 안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도 짠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이름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길 바라는 목소리도 있지만 대다수는 어떤 향수나 위안, 진심 같은 걸 이 영화로부터 얻어가는 것 같다. 1000만 영화를 향해 질주 중인 <변호인>의 핵심적인 흥행 전략 역시 바로 그것일 것이다.

지지하는 영화의 대박에 한 표 보탬이 되고 싶다면, 혹은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고 뭉클한 힐링의 대열에 동참하고 싶다면 <변호인>이 전하는 1980년대 노무현의 삶만 추억하며 극장을 나서면 된다. 그러나 변호인의 진정한 이야기는 '그 이후'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스크린 바깥에는 감동의 여운 따위가 아니라 그가 없는 현재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던, 한 치의 불의와 거짓도 용납지 않았던 우리의 변호인은 왜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일까.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송우석 변호사가 법정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변호인은 그로부터 15년 후 자신이 맞서 싸웠던 국가 권력의 최고 자리에 올라선다. 세상은 마땅히 훨씬 더 좋아져야 했지만 수많은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보수 세력의 저항도 있었고 그 자신의 오류와 한계도 있었다. 2003년부터 2009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그에게도 국민에게도 좌절의 연속이었다. 영화 <변호인>은 그러나 그가 끝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근원들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반성도 전략의 단초도 쥐여 주지 못한다. 오직 노무현을 향수와 연민의 자리에 가두어놓고 상업적 용도든 추종자들 결집이든 목적한 바를 이루는 데 충실할 뿐이다.

자연히 우리의 시야도 과거에 갇힌다. <변호인>은 선과 악의 '손쉬운' 이분법이라는 익숙하면서도 퇴행적인 해법을 다시 꺼내든다. 좋은 사람은 끝까지 좋은 사람이고 영웅적 희생자고, 악인은 아무 고뇌와 갈등도 없는 태생부터 괴물이자 가해자다. 조작과 고문에 앞장섰던, 하지만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아버지를 잃는 아픔을 겪은 차동영(곽도원 분) 경감이나 '자각' 이전의 그저 먹고사는 데만 바빴던 송우석 같은 사람의 삶은 포기되고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가. 노무현의 '재림'을 꿈꾸는 사람들의 계속된 좌절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일도양단식 도덕적 재단과 편 가르기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 것 아니었던가.

영화 <변호인>은 그러므로 간직하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민주주의가 불안한 이 시대 현실과 공명한다고 하지만 '응답하라 1987!'이란 외침에 왜 별 메아리가 없는지 오히려 돌아봐야 할 때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며 새로운 시작을 당부하고 떠난 그분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변호인>의 시간을 넘어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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