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학교 담벼락에 붙였다는 그 하나의 이유로 경찰에 고발당한 고등학생들이 어른들과 세상에 대해 갖게 될 비관이 어떠할지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을 노릇이다.

아이들을 감싸주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그 아이들을 경찰에 넘긴 주체가 교장과 학교 당국이라는 점은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데올로기 다툼을 넘어서서 기본적으로 인간 윤리적 관점에서 어른들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점이라 본다.

그것은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통탄해할 자격조차 없는 어른의 못나고도 어린 짓에 불과하다. 과연 그 어른들은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청소년 시기를 주체적으로 성장해 온 어른들이나, 또 학교에서 그 시기의 아이들을 체험적으로 만나본 이들이라면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이들은 결코 어리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간혹 배움의 과정에서 아이들의 타산적이거나 무기력한 모습에 적잖이 실망스러운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이 비단 아이들 하나하나의 책임이라고만 돌릴 수 있는 문제일까.

우리 어른들, 또 우리가 만들었거나 방치해놓은 이 세상의 모순적 구조에 더 근원적인 탓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제목)이면 그저 족할 것 같다. '호밀밭' 밑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파수'만 해주면 될 것이지, '호밀밭'을 통제하려거나, '호밀밭' 그 벼랑 끝으로 아이들을 내밀어버려서는 안 될 노릇이다. 이것이 어른들이 가져야할 아이들에 대한 기본 윤리, 진정으로 사랑하기의 방식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와 너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은, 나의 절박함이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은 어느 지점에서 연결되는 고통의 소통이다. 그 고통의 공명 속에서 무수히 다른 사람들은 '우리'로 모두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통의 심연, 그 거칠고 메마른 바닥에서 함께 울어주는 것. 학교든 사회든 모든 공동체의 윤리라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활고와 정권에 대한 분노로 최근 분신자살한 이의 고통도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질문을 시작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각자 다양한 사람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화엄경'의 인다라의 구슬에 대한 비유처럼 말이다.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들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고 한다.

   

그렇게 모든 존재, 우리 여럿은 여럿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또 동시에 서로 닮아 하나가 되어가는 것, 곧 사랑한다는 것.

/서은주(양산범어고 교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