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황인수 창원호 선장

여수 밤바다 / 이 조명에 담긴 /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 네게 들려주고파 / 전활 걸어 / 뭐하고 있냐고 /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 여수 밤바다(버스커버스커 - 여수 밤바다).

가본 적 없지만 그 노랫말처럼 아늑한 분위기일 거 같은 여수 밤바다. 귓가에 울리는 트로트 메들리와 대조적인데, 시끌벅적한 음악과 함께하는 마산 야경도 괜찮다. 나는 지금 마산 밤바다. 화려한 조명에 휘감긴 유람선 위에서 동네사람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창원시 마산어시장 유람선(창원호) 선장, 황인수(62) 씨다.

황인수 선장은 요즘 같은 비수기에는 대절을 하고 있는데, 오늘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창회를 하고 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언제부터 이 일을 했는지 물었다. "한 서른 살 정도 됐어. 이걸로 하면은 내한테는 맞겠다, 내가 한 번 멋지게 할 자신이 있다, 있겠다 싶어 시작했어."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마저 다른 남자에게 떠났다. 살기 힘든 탓에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밖에 못 나왔고, 그렇게 남은 가족들끼리 없이 살다가 가출을 했다. 밥 얻어먹을 곳을 찾다가 누군가의 집에 양아들 겸 일꾼으로 들어갔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고성 내산리에 있는 집이었어. 고기 잡는 일을 하는 집이었는데, 거서 책임자 일을 맡았지. 투망하라고 지시하는 거 있잖아. 그 계기로 배를 타게 됐어. 그래서 내가 책임자도 하고, 기관사도 하고 그랬어. 기관사는 한 20살. 20살 정도 되는 사람 중에 기관사는 없었지. 내가 최연소 기관사라."

하나, 사는 게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좀 벌어놓은 돈을 양아버지 집에 맡기고 군대 갔는데, 돌아오니 집이 망해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가지고 남의 배를 탔지. 기관사로 있었는데, 그거 하다보니까 너무 힘들기도 하고, 오래해서 싫증나 유람선을 한 거지. 수입도 되겠다, 가락도 있겠다, 내가 함 하믄 괜찮겄다, 그래서 마산으로 건너와 뒤도 안 돌아보고 꾸준히 이 사업을 한기라. 그때가 1980년대 초라."

처음엔 보잘것없었다. 배도 작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허리띠 졸라매고 돈을 모았다. 과장 조금 더해 태풍이 와도 손님이 있으면 바다로 나왔다. 야간에 섬과 섬을 이어주는 일도 했는데, 위험한 탓에 운항하는 이들이 없었지만 그는 나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거 생각을 안 한'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 이곳, 마산어시장 앞바다로 왔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다.

사업수완이 있었다. "요즘 뭐 여자들 낚시하러 오면 누가 미끼 끼워주는 사람 있나? 난 손님들 끌라고 선상낚시하믄 여자들은 전부다 미끼를 끼워줬어. 내 손을 가지고. 그런 사람 없어. 또 손님들하고 대화도 잘한다고. 손님들 오면은 옛날이야기도 하고,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거든. 그라다 보니까 사람들 많이 탔어."

다른 사람보다 멋지게 꾸몄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사용했다. 손님들한테 잘해주기까지 하니 입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경쟁 배들을 박살내버렸다고.

야간 운항 또한 그의 자신감에서 시작됐다. "창원 귀산에 가면 유람선이 하나 있어. 그 배는 시작하자마자 야간을 했어. 조명을 적당히 해가지고. 그 배가 야간을 하니까 상대적으로 손님이 떨어지는 거야. 나는 넘한테 뒤떨어져가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그래 우리도 야간 허가를 내 지보다 조명을 확실히 멋있게 해가지고 하니까 많이 타데. 배도 너리고, 또 어시장 위치도 좋고 하다 보니까."

햇수로 4년째다. 2000만 원을 들여 조명을 설치한 첫 해는 본전도 못 찾았지만 두 번째 해부터는 돈이 남았다. "거 가믄 좋더라"는 소문이 나고 나서 지난해(2013년)에는 밤에 한 게 고스란히 남았다고.

그런 그에게 또다시 풍파가 닥쳤다. 창원시에서 연안 크루즈 운항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듣기로는 '1년에 2억 주꾸마, 기름값 다 대 주꾸마' 이래가지고 배를 끌고 온다는 소문을 들었어. 기존 유람선들, 옛날부터 하던 배들은 아무런 의논도 없이 팽개쳐삐고. 그래 객지서 오는 배는 대합실도 만들고 이래가지고, 뭐 돈도 주고 이래가지고 한 그득 만들어주면서, 기존 오래하던 유람선 배들은 아무 의논도 없이 죽든지 말든지 팽개쳐놓고…. 이거는 있을 수가 없어."

방재언덕 조성까지 더해져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음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나는 조명을 좀 더 멋지게 해가지고, 그걸로 승부 걸 거야. 또 시간을 어그러지게 하고. 그게 7시 나가면 난 7시 반에 나간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그놈들이 왔다고 발 뻗고 있을 수는 없고,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다. 몇 있는 동생을 두고 가출했을 때에도, 양아버지 집이 망해 맡겨놓은 돈을 몽땅 날려버렸을 때에도, 사채 문제로 친척들한테 몇 억 떼였을 적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바다로 나왔다. 화려한 조명이 있었고, 아름다운 야경이 있었다. 거기다 목청껏 부르는 유람객들의 트로트 메들리까지…. 뱃놀이 인생만 30여 년인 황인수 선장. 그에게는 '놀던 가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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