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6) 통영별로 22회차

갑오년 새해 첫 나들이입니다. 두 갑자 전 갑오년은 갑오농민전쟁으로 조선 정부가 전근대적 제도를 폐기하고 근대화를 추진한 갑오개혁이 일어난 해입니다. 그 구상에 일본이 개입되고, 또 졸속적으로 추진된 것이어서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갑오경장은 우리 역제사(驛制史)에 한 획을 긋게 되는데요. 이때 전근대적 역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2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옛 우역제도의 자취를 찾기가 어려운 건 무슨 아이러니일까요.

◇정여립(鄭汝立) 생가지

전북 완주군 상관면은 슬치 아래에 있는 남관의 위(북)쪽에 있는 관이란 의미로 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지도서> 전주 방리에 "상관면(上關面)은 관아에서 20리이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남관은 고종 10년(1873)에 진을 쌓기 전부터 관문으로 인식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관면 들머리의 월암마을은 <근세지형도>에는 쌍정(雙亭)이라 적혀 있는데, 조선시대 대동(大同) 사상을 펼친 정여립(1546~1589)이 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전주 출신으로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이 되었으나 이이와 성혼을 비방한 것을 왕이 미워하여 고향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는 낙향하여 가까운 진안 죽도에 서실을 열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세력을 불려 거사를 도모하였습니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였으니, 요즘 입장에서 보자면 이곳 상관은 제대로 상관한 곳이지요. 1589년(선조 22)에 거병을 앞두고 동료의 배신으로 관군의 토벌에 직면하여 아들과 진안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대동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하고 맙니다.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도 진행되어야 하지만,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선시대를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호남은 반역향이 되었고 지역 인사들의 관계 진출이 철저하게 외면당하게 됩니다. 정여립의 생가 터는 숯불로 지진 후 파헤쳐 소(沼)를 파 버렸는데, 지금은 그곳을 메워 철도가 지나고 있으니 아직 그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지금 그곳은 파쏘라는 지명을 남기고 있는데, 자리에는 생가지를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곁에는 마을에서 세운 정자가 사실을 전할 뿐입니다.

또한 그곳에는 관찰사조공한국청덕영세불망비(觀察使趙公漢國淸德永世不忘碑)와 일부러 글자를 지운 듯한 군수 모씨의 빗돌 1기가 자리를 지키며, 이곳이 옛길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조한국(1865~?)은 1900년에 전라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어 전주 사람들이 유임을 조정에 청하였다고 전합니다. 전라북도에서 만든 순례길에 포함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으니 이제야 그의 넋이 위안을 받으려나요. 그곳을 지나면 동쪽으로 작은마재로 이르는 길이 정여립이 진안의 죽도로 오가던 길이라 전합니다.

◇상관원(上館院)

옛길은 구철도가 덮어쓰고 신리역을 향해 뻗어 있지만, 조금 들어가서 보니 역을 확장하면서 묻혀버리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월암마을에서 철도 아래 굴을 통해 나와 신리로를 따라 상관면소재지로 듭니다. 장신원(長信院)이 있던 곳인데, 상관중학교 남쪽이 그 자리로 헤아려지지만,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신리라 쓰고 달리 신원 새원 서원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장신원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보입니다. 원집의 서쪽에는 사창(社倉)이 있던 사창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두를 거쳐 광곡으로 이르는 고개인 왜목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은 고개라 그런 이름이 남았습니다.

원집이 있던 신리를 벗어난 길은 신흥에서 죽림리에 이르는 구간은 국도 17호선이 덮어쓰고 있습니다. 죽림온천 부근에서는 국도보다 약간 더 동쪽으로 전주천 연변을 따라 길이 열렸는데, 대체로 지금의 둑길과 선형이 비슷해 보입니다. 온천과 역 사이의 마을을 예전에는 작동(雀洞)이라 했는데, 지금은 마을은 없어지고 북치로 가는 들머리일 뿐입니다.

◇남관진(南關鎭)

이곳에서 전주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 양쪽에서 흘러온 물이 합쳐지는 사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남관진(南關鎭)이 있던 용암리 남관입니다. 남관 들머리를 비석거리라 했는데, 예전 이곳에 판관과 도순찰사 등의 선정비 대여섯 기가 있었다고 전합니다만, 지금은 남관진창건비만 있습니다. 남관에서 서쪽의 쑥재로 이르는 들머리에 있는데, 고종 10년(1873)에 남관진을 둔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남관진창건비. /최헌섭

빗돌은 가첨석과 비대를 갖추었지만, 몸통 곳곳에 박힌 총탄 자국은 지우지 못할 전쟁의 상흔을 남겼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롯가 잡초 속에 파묻힌 채 방치돼 있다가 도로확포장 공사에서 발견되어 전라금석문연구회의 해석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전라금석문연구> 제2호와 이곳에 둔 안내간판에 실린 비문 해석에 의하면, "동어 이상황과 박윤수가 본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남고산에 진장(鎭將)을 설치하고 남관에 진(鎭) 축성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이 어려워 중단하였다가 61년이 지난 후 낙재 이호준이 관찰사로 부임한 지 4년 만에 임금에게 상소하여 대원군의 명으로 남고진으로부터 10리 남짓 떨어진 이곳에 진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 남관진의 입지적 특성을 빗돌에는 "하늘이 낸 험한 곳이어서 촉(蜀)의 잔도와 진(秦)의 함곡관 등과 겨룰 만하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남쪽에 함께 둔 만마관을 아울러 이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남고산성에 속했으나 점차 중요도가 더해져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고 장대(將臺)를 따로 두고 관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빗돌에서 남관교를 건넌 즈음은 장승배기인데, 그곳에 장승을 둔 것은 슬치를 넘어 남관진으로 드는 들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만마관(萬馬關)

남관진을 지나 슬치를 향해 가면 머지않은 곳에 만마관이 있습니다. 예전 거리로는 5리라 했으니 먼 길은 아니지만, 저 고개를 넘으면 임실 땅이려니 생각하니 걸음을 재게 됩니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통영에서 별로를 거슬러 오른 김용재 선생이 블로그에 남긴 글이 있습니다. 그이가 통영을 출발하여 이곳까지 온 길을 연재한 기사가 11회 차이니 우리도 그만큼 걸어야 통영에 닿겠지요. 우리가 걸어 내려오고 있는 길을 거슬러 오른 이가 있어 앞으로 그이의 걸음이 우리를 안내하리라는 기대에 만마를 얻은 듯 힘을 냅니다.

만마관은 남관진에서 슬치를 향해 조금 더 오르면 그 터를 만나게 되는데, 지금은 다 무너지고 성돌만 어지러이 뒹굽니다. 이곳은 <조선왕조실록> 고종 10년(1873) 7월 13일 기사에 설치 자금을 낸 김현규를 표창한 기사가 실려 있어 축성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본 남관진과 함께 두어 섬진강 유역을 거슬러 전주로 짓쳐오는 왜를 막기 위해 쌓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이 성을 쌓을 때 그들은 이미 명치유신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으니 만시지탄임을 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림에서 슬치 가는 길. /최헌섭

◇슬치를 넘다

만마관을 지난 길은 슬치(瑟峙)에서 지금은 노령산맥이라 부르는 옛 호남정맥을 넘습니다. 슬치는 달리 소치(掃峙)라고도 했는데, 소의 훈이 '쓸다'이니 동쪽 고개를 이르는 살재 또는 살티를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적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듯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산맥은 중국 방향의 습곡산지로 이루어져 그 축이 북동-남서를 띠는데, 이에 비해 우리가 걷는 옛길은 그와 교차하는 북서-남동축에 가깝게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산경을 분수령으로 삼는 물줄기가 흐르는 곡벽을 따라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고개에서 전주천 유역과 헤어져 섬진강으로 이르는 물줄기를 따라 남원으로 이르게 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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