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리다] (55) 통영별로 21회차

다들 어제 동지 팥죽은 드셨는지요. 동지(冬至)는 한 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날이라 옛말처럼 노루 꼬리만한 해를 벗 삼아 길을 걷자니 노정이 줄어들질 않습니다. 날씨는 또 얼마나 춥고 고약한지 옛 사람들은 범이 불알을 동지에 얼구고 입춘에 녹인다고 했을까 실감하며 걷습니다. 오늘 여정은 전주를 나서서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남천교를 건너다

전주천에 놓인 남천교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금은 다리 아래를 흐르는 내를 전주천이라 하지만 옛 이름은 전주부성의 남쪽으로 흐른다 하여 남천입니다. <여지도서> 산천에 "남천은 여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관아의 동남쪽에 이르러 성을 휘감아돌아 북쪽으로 가련산을 지나 추천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추천이 앞서 지나온 가리내이니, 옛 사람은 실제 물이 합류하는 지점을 북녘을 기준으로 갈라졌다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옛길은 예서 지금의 전주천서로와 서학로 사이로 열렸으나 그곳은 국립무형유산원이 차지하고 있어서 부득이 국도 17호선을 따라 걷습니다. 이곳은 예전에 전주임업시험장이 있던 곳이라 비록 조경림이지만 수목이 울창하여 길을 걸으며 보는 눈맛이 시원합니다.

◇좁은목

이곳을 지나니 17번 국도의 이름이 춘향로(春香路)라 적혀 있어 아직 전주를 제대로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음은 남원에 닿습니다. 바로 그즈음이 전주의 남쪽 길목인 좁은목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이곳은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남고산과 승암산이 몰입해 지협을 형성한 곳으로 예서는 좁은목이라 부릅니다. 예전부터 전주에서 남쪽으로 오가던 길목에 자리한 관문과 같은 전략적 요충이었던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좁은목의 동서 양쪽 구릉에는 남고산성과 동고산성을 쌓아 길목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곳에는 전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약수터가 있는데, 시민들이 이곳을 얼마나 아끼는지 남부순환도로를 낼 때 남고산 아래로 굴을 뚫으려던 계획을 무산 시키고 지켜 내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여기서 시원한 물 한 잔에 목을 축이며 잠시 다리품을 쉬었다 갑니다.

전주천 둑길을 걷다. /최헌섭

◇남고산성

후삼국시대에 백제를 세운 진훤이 쌓은 것이라 전해집니다. 전주 남쪽의 남고산(272.6m) 정상에서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이어지는 봉우리를 이어 쌓았는데, 북쪽으로는 계곡을 안은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입니다. 성이 자리한 곳은 동쪽으로 전주천과의 지협인 좁은목을 사이에 두고 있어 남동쪽으로 곡벽을 따라 열린 임실·남원·고창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의 동쪽 승암산에 남아 있는 동고산성과 마주보고 있어 성의 방비 목적이 이 길목을 지키는 데 두어졌음을 더욱 더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성의 북쪽인 전주 방면이 계곡으로 열려 있어 방어의 주안은 남쪽에서 전주로 진입하는 적을 차단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의 모습은 순조 13년(1813)에 고쳐 쌓은 것이며, 성의 이름도 이때 남고산성이라 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이곳 남고산 동쪽 자락에는 창건연기설화가 삼국시대로 올라가는 대승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흥법 제3에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를 받드니 보덕이 암자를 옮겼다는 사실을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반룡사(盤龍寺)에 있던 승려 보덕(普德)이 신통력으로 절을 날려 남쪽의 완산주(지금 전주) 고대산(孤大山, 지금 고덕산)으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650년 6월에 있었던 일이며, 이 산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11명의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뒤에 제자들이 여러 절을 세웠는데, 이곳 대승사(大乘寺)는 지수(智數)가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의 거점이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15개의 돌무더기는 그때 투석전에 사용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런 까닭에선지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가 된 이래 방치되어 있다가 근년에 중건하였습니다.

돌멩이가 싸움에 쓰이기 시작한 시기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기는 청동기시대 환호에서 나온 투석용 돌에서 비롯합니다. 그 뒤로 고대는 물론 조선시대 성곽에서도 이런 돌멩이가 나오는 것을 보면, 현대화된 전쟁이 치러지기 전까지 줄곧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돌싸움을 석전(石戰)이라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곳 전주 배티(이치梨峙)에서도 투석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석전은 우리 지역의 김해가 그 전통을 오랫동안 이어와서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놀이로 즐겼습니다. 이렇게 익힌 실전 감각은 결국 삼포왜변(1510년)이 일어났을 때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김해와 안동 지역의 석전꾼을 전투에 투입하여 왜인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사대원

좁은목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남고산 옆길을 따라 옛 사대원(四大院)이 있던 즈음에 이릅니다. 좁은목으로 옛길이 지났음을 고려하면 원은 전주천 남쪽의 원당리 원원당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도에는 그 너머 승암산 자락에 사대라는 지명을 남겼습니다. <여지도서> 전주 역원에 "사대원은 관아의 남쪽 5리에 있었다"고 했으니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미 그 쓰임이 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대원이 있던 원당리에서 달리는 차량의 굉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주천 둑을 따라 열린 도보길을 따라 걷습니다. 물론 옛길이 이와 같이 열렸던 것은 아니지만, 얼마지 않아 색장동을 향해 전주천을 건너야 하기에 미리 이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하천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은 물에 잘 닳은 자갈이 바닥을 이루고 있어 물이 매우 맑습니다.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걷던 날도 곳곳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낚시를 하는지 수석을 줍는지 모여 있거나 서성입니다. 잘 정비된 둑길에는 자전거 여행에 나선 이들이 빠르게 스쳐갈 뿐 걷는 이는 우리뿐입니다.

둑길을 따라 색장교를 통해 전주천을 건너니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가 길손을 반깁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나이가 200살이 더 되었지만 느티나무로는 한창때입니다. 마을 안 원색경로당 앞 순례길 경로 안내판에는 우리가 건너온 전주천 서쪽으로 길을 안내하고 있어 만나자 이별입니다. 예서부터는 전주에서 남쪽으로 약간 처지며 동쪽으로 이른 길을 마감하고 전주천 연변을 따라 거의 남쪽으로 곧게 난 길을 걷게 됩니다. 옛길의 선형도 이러하지만 17번 국도와 전라선 철도도 전주천의 흐름을 거슬러 곧게 뻗어 있습니다. 이런 길은 보기에는 시원하지만 걷기에는 무척 지루한 길입니다. 하지만 자동차의 소음을 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야말로 감지덕지입니다.

◇상관으로 향하다

색장동을 벗어나 은석동에 드는 즈음에서 옛길은 전라선 철도가 덮어쓰고 있습니다. 다행히 전라선 복선이 건설되면서 그 곁에 옛 철선이 버려져 있어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걷습니다. 예서부터 슬치를 넘는 구간은 갖가지 도로의 경연장입니다. 옛길과 둑길, 17번 국도, 순천완주 고속국도에 전라선 철도까지 모든 길이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열렸으니 그리 볼만도 합니다.

   

은석동에서 전라선 구철선의 신리터널을 빠져 나오면 상관면입니다. 예서부터 구철선은 포장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그리 오래된 길은 아니지만 그 모습을 보니 향수가 입니다. 역에 가까워지자 구철선은 경지로 잠식되어 철도 아래의 굴을 통해 상관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재미있는 구호가 게시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상관 사람들더러 상관없다 상관마라고 희롱을 했나 봅니다. "상관있다. 상관하자. 상관 파이팅!"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참여의식이 민주사회를 이루고 끌어가는 바탕입니다. 그래서 상관 파이팅!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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