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주말] (95)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이즈음에 뜬금없이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은 건 한동안 체험과는 멀었던 여정에 대한 보상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수학여행이든 역사 기행이든 한 번쯤 와봤을 이곳.

최근 '평화 파크 체험시설'과 '1950년 체험관'이 새로 문을 여는 등 각종 체험 공간을 갖추었다니 야외로 여행이 쉽지 않은 요즘 가기 딱 적당하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역사의 상흔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머지않은 과거이지만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조차 난감한 아픈 역사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6·25 전쟁 중 유엔군과 한국군이 사로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집단 수용할 목적으로 1950년 11월에 설치된 거제포로수용소.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됐고 옛 포로수용소 일대에 유적공원이 조성됐다.

거제포로수용소는 여전히 관광 명소였다.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들이 즐비해 있고 제법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 제법 북적거렸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북한군의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 탱크모형을 관람하는 순간부터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6·25역사관 △흥남철수작전기념비 △대동강 철교 등 공격과 후퇴를 오가며 치열했던 전투와 필사적이었던 피난민들의 고난을 엿볼 수 있다.

MP 다리를 건너면 포로들의 생활을 자세히 관찰하고 체험해 볼 수 있다. 특히 영화 <흑수선>의 촬영장이기도 했던 야외 막사에는 감시 초소와 취사장, 생활도구까지 재현돼 있어 교육공간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총 24곳에 이르는 유적공원 테마관과 함께 올 10월 1일 문을 연 △평화 미래전시관 △4DFX씨어터 △어린이 평화정원 △평화수호대 △평화탐험체험관까지 경험하고나면 반나절은 훌쩍 지나갈 듯하다.

◇이곳은 꼭!

△평화탐험체험관 = 격렬한 전쟁 현장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일화를 직접 체험하는 라이드쇼 공간인데 제법 흥미롭다.

우선 폭격과 총소리가 귓속을 파고들고 무너질 듯한 건물들로 전쟁의 공포를 오감으로 체험하고 나면 전장 그 한가운데 직접 총을 겨누며 적과 대치 상황을 체험해본다. 그다음은 배를 타고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체험이다. LST(미국의 상륙 작전용 수송함)에 승선해 5분여 동안 흔들리는 배 위에서 영상을 보며 거제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상황이 재현된다.

포로수용소에 잠시 머문다. 이후 기차를 타고 귀환하는 체험으로 마무리된다.

창 밖으로 태극기가 펄럭이고, 경적 소리와 기차의 미묘한 떨림과 함께 송환되는 포로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나면 당시 상황을 보다 쉽게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1회 이용료 3000원.

   

△1950년 체험관 = 거울 미로와 착시 미술체험관, 사격체험관으로 구성됐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미로 여행으로 거울 미로 속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지뢰와 감시관들이 서 있고 오직 흰 장갑을 낀 손과 느낌만으로 미로를 통과해야 한다.

5개의 미션을 수행해야 찾을 수 있는 미로를 통과하면 착시 미술체험관에서는 트릭 아트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실제 포로들 속으로 들어간 듯한 사진도 찍고 탱크와 비행기, 낙하산을 탄 듯한 기분을 느껴볼 수 있으며 사격체험장은 남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1회 이용료 거울 미로&착시 미술 3000원. 사격체험장 2000원.

△거제포로수용소 입장 시간 및 요금 = 4∼9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3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입장료는 어른 45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1500원. 055-639-0625.

   

◇거제포로수용소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도 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개시해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되었다.

국군은 미군 및 유엔군 지원을 얻어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100만여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38도 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전쟁 중에 늘어난 포로를 수용하도록 1951년부터 거제도 고현, 수월 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인민군 포로 15만, 중공군 포로 2만 등 최대 17만 3000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1951년 7월 10일 최초의 휴전 회담이 개최됐으나 전쟁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겪었다.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 간에 유혈 살상이 자주 발생했고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도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이었다.

1953년 6월 18일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반공 포로 석방을 계기로 그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6·25전쟁은 끝났고 수용소는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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