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 하에서 활동한 진정한 지식인

며칠 전(5일)에 리영희 선생 3주기가 지나갔다. 이날 제1회 '리영희상' 시상식이 열렸는데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 상을 받았다. 리영희재단은 "지난 대선에서 발생한 국가정보원 직원 댓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권 과장의 노력이 리영희 정신에 부합해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기자 리영희'는 생전에 사실보도를 통한 진실 추구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권 과장 역시 공직자로서 특정 정파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데 힘썼는데 이런 면모가 '리영희 정신'에 부합된다고 재단은 평가한 것이다.

1929년 일제 중기에 태어난 선생은 식민지 교육과 해방공간에서 청년시절을 보냈으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하에서 기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자각과 성찰이 없이는 버텨내기 어려운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다간 선생은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고 <대화> 서문에 쓴 바 있다.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는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이에 따라 선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 왔노라고 밝혔다.

서울시 제기동 집 마루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리영희 기자. /<대화>

기자 리영희, 교수 리영희를 포괄하는 말은 '지식인 리영희'다. 흔히 '야만의 시대'로 불리는 한국 근현대 100년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비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이 <우상과 이성>을 출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성이 고립되고 우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상 타파와 이성의 회복을 위한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보수 일각으로부터 '의식화의 원흉'으로 매도당하면서도 선생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시대적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잇따른 해직과 복직, 구속과 사면복권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식인 리영희'를 떠올리면 나는 세 가지가 생각난다. 행동하는 지식인,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 공부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리영희. 관련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4월 18일 고대생 데모가 발생하자 선생은 일주일째 회사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24일 밤 선생이 근무하던 합동통신사 정문 앞에서 데모대와 경찰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됐다. 선생은 편집국에서 의자 두 개와 메가폰을 들고 나와 데모대와 계엄군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의자 두 개를 포개 세운 위에 올라가 미국정부의 발표문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계엄군과 학생 데모대 양측의 자제를 촉구했다. 심지어 선생은 주한미대사관의 그레고리 핸더슨 문정관에게 부탁해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에서 자제 방송을 할 계획마저 세웠었다. 이런 기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둘째, 5·16쿠데타 후 61년 11월 박정희의 첫 방미 수행 취재 건. 국내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케네디가 쿠데타 정권을 승인하지 않고 민간정부로의 권력이양에 대해 압력을 넣어주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조선, 동아 등은 케네디가 박정희의 쿠데타를 용인하고 또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약속했다며 이 같은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다면 선생의 보도는 어땠을까? 선생이 속한 합동통신은 케네디가 박정희에 대해 조속한 시일 내 민정이양과 쿠데타군의 원대복귀를 요청했으며, 그때까지 군사·경제 원조 집행을 연기한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는 동아, 조선의 보도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이게 진실이었다. 선생은 체질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했고, 또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끝으로, 선생은 기자이자 교수이면서 국제문제 전문가였다. 특히 중국 사정이나 극동문제에 대해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이는 전적으로 선생 스스로 공부해서 얻은 지식의 결정체로, 당시 젊은이들에게 세상의 눈을 띄워준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문번역 등 부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선생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2000년 말 뇌출혈로 쓰러져 우반신 마비가 된 것도 무리한 집필로 인한 것이었다. 그 흔한 석·박사 학위 하나 없었으나 선생은 '종신면학(終身勉學)'을 실천했다. 그만한 기자가 또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운현(寶林齋·http://blog.ohmynews.com/jeong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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