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딸 신준영이 쓰는 엄마 정현자 이야기

4년째 외손자를 돌보고 있는 엄마 정현자(55·주부) 씨에게 딸 신준영(31·사회복지사)이 하는 인터뷰. 바로 시작해 보겠다.

-엄마는 태어난 곳이 어디예요?

"1959년 10월 5일(음력), 진주 내동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얼마나 골짜기인지 버스도 잘 안 다녀, 매일매일 걸었단다."

-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너무 가난한 집에 2남 3녀 장녀로 태어났고, 네 할아버지는 엄마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단다. 집이 너무 어려워서 초등학교 마치고 바로 돈 벌러 가는 게 꿈이었다. 그때는 대부분 그랬지. 네 외할머니 혼자 농사지어 돈 벌었고, 그래도 남자라고 외삼촌은 중학교도 보냈는데 엄마는 꿈도 못 꿨다. 다른 친구들은 교복 입고 가방 메고 학교 가는데 그것도 동네에 한두 명밖에 없었다. 많이 부러웠지…. 엄마는 바로 공장 가서 돈 벌었지. 그때 또래 아이들 공장에서 엄청나게 고생했다. 요즘 아이들은 조금 힘들면 힘들다 아프다 카는데…. 지금 일은 일도 아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꿈도 안 꿔봤네. 지금이라도 꿔볼까? 진짜 그때는 왜 꿈도 없었을꼬…."

-형제는 어떻게 돼요?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큰오빠는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간암으로 일찍 돌아가셨지. 지금 살아있었으면 64살인데, 56살에 돌아가셨다. 생각만 하면 눈물만 난다. 김해 장유에 사는 둘째 오빠도 고생 많이 했다. 없는 집에 태어나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셋째는 나. 넷째 동생 영자는 아직도 고생이네. 그리고 우리 막내. 그래도 네 막내 이모는 혼자 벌어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단다. 집이 너무 어려워서 아직도 형제들이 고생 많이 하지만 항상 정이 있고, 돈독하게 지낸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힘이 난단다."

-엄마 손자들 이야기 좀 해주세요.

"우리 딸이 낳은 우리 집 첫 손자 이유성. 벌써 네 살이나 되었네.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나서 우리 딸을 얼마나 애태웠는지…. 2.4kg 미숙아로 태어났지만 건강한 우리 집 첫 손자. 나한테도 유성이는 남다르지. 태어날 때 내가 바로 봤으니, 우리 둘째 손자 이승윤. 이놈은 또 왜 한 달 일찍 태어났는지…. 승윤이는 이제 돌이 지났네. 첫 손자가 한 달 일찍 태어나서 그런가 둘째 놈은 그래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네.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더 좋았을 걸, 좀 아쉽다. 마지막으로 우리 친손자 신승헌. 승윤이 낳은 다음 날 승헌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엄마가 얼마나 또 놀랐는지 몰라. 우리 집 손자들은 다 성격이 급한가 보다. 예정일 맞춰 나온 놈들이 하나도 없네."

-제가 직장에 가면 아이들이랑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말해주세요.

"유성이는 눈뜨자마자 만화 틀어달라고 하고, 승윤이는 일어나면 엄마를 찾는지 울기도 하고 방마다 문 열어보고 확인도 하더라. 유성이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커서 그런가 엄마 많이 찾지는 않지. 아침밥 먹이고 유성이는 어린이집 가는데 아직도 뽀로로 차를 타고 다니네. 애들 조용할 때 나는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러면 반나절이 지난다. 유성이 외할아버지가 낮에 오는 날이면 집으로 가서 틈틈이 농사도 지어야 하고 밥도 챙겨놔야지. 또 어린이집에 가서 유성이 데리고 와야지. 집에 와서 씻기고, 밥 먹이고, 그러고 나면 니네가 오잖니. 그럼, 또 너희 밥도 차려줘야 하고…. 온종일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하루가 다 지나간다. 이제 엄마도 늙었는지 하루하루가 고되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외손주들 재롱 보면서 하루하루 지내는 거지."

-엄마 힘들죠? 너무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미안해요. 저도 아이를 낳고 부모 마음을 알았네요. 죄송한데, 그래도 우리 아이들 학교 다닐 때까지는 봐주실 거죠?

"우리 딸. 엄마는 못 배워서 딸이 직장 나가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제는 나이 들어 아빠랑 있는 것보다 오히려 손자들 보면서 지내는 게 더 좋단다. 우리 딸 둘째 낳고 직장 그만뒀을 때 엄마도 마음이 아팠지. 자식 두고 직장 나가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엄마가 아들 잘 보고 있으니 너무 걱정말거라."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에게 바라는 점 한마디 해주세요.

"우리 아들·딸은 크면서 속 썩인 적이 없지. 아빠가 술만 좀 줄이면 좋겠네. 우리 오래오래 건강하게 삽시다. 우리 아들·딸은 직장 다니면서 돈 많이 벌게 되면 엄마 용돈도 올려 주거라. 엄마가 돈 벌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잘 되면 그때 많이 줘도 되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직장 잘 다녀라. 그리고 우리 손자들. 우리 똥강아지들. 밥 잘 먹고 건강하고 할머니 많이 많이 좋아하기. 우리 손자들 다 커서 결혼할 때까지 살아야 겠다."

   

엄마. 왠지 가슴 뭉클해지는 한 단어. 가난한 집 2남 3녀로 태어나 꿈많은 소녀 시절에도 꿈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 엄마. 어린 동생과 가여운 어머니가 먼저였던 시절, 교복·가방 대신 작업복과 먼지로 가득했던 공장생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습니다.

무뚝뚝하지만 가정적이었고,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성실했던 아버지. 아들·딸 낳아 행복한 가정으로 키워주셨습니다. 아빠 월급날이 되면 통닭·자장면·삼겹살·돈가스 외식을 하고, 엄마 생일이 되면 아빠는 어김없이 꽃도 보내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다시 공장으로 나가셨습니다. 아버지 월급으로는 저금을 못 할 것 같았고,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겠죠. 제가 5학년 때쯤, 엄마는 일하다가 손가락을 다치셨습니다. 기계에 손이 들어갔는데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지만 검지와 약지를 많이 베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손으로 어김없이 출근하시고 밥도 짓고 설거지를 하셨습니다. 하루도 편하게 쉬어본 적 없는 하루. 손이 아파 일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매일 진통제 먹어가며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엄마 옆에 사는 못난 딸. 아이를 낳고 엄마는 우리 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아이 때문에…. 둘째를 낳았고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다시 엄마는 일터로 나갔고, 여전히 아이도 봐주셨죠. 중년 부부의 안정된 생활을 즐기셔야 할 시기에 두 아이를 어머니께 맡겨야 하는 제가 너무 큰 죄를 짓는 게 아닌가 자책도 해봅니다.

/신준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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