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4) 통영별로 20회차-전주(하)

오늘은 하루 더 전주를 살필까 합니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18세기 후반의 전주지도를 살펴보면, 일제에 의해 우리의 전통이 얼마나 손상을 입었는지 울화가 치밉니다. 평화로운 봄날의 어느 한때를 그린 회화지도의 잘 정비된 가로망과 성 안팎에 배치된 건축물 등등 얼마나 많은 역사문화경관이 지워졌는지요.

특히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과 부윤의 집무처 등의 관아 일대와 성 남동쪽 바깥 전주천변의 중영 등은 완전히 멸실되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에 묘사된 교동 일원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모나게 구획된 가로 사이를 메우고 있는 집은 평화로운 모습의 초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남서쪽으로 효종 임금 5년에 창설한 중영(中營) 남동쪽에서 무지개다리인 남천교를 건너기 전까지의 도회에서 기와집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하다면 지금의 한옥마을은 그 뒤 어느 때 만들어진 것이 분명할 터이니 이를 상고해 볼까 합니다.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홈페이지에서 마을이 비롯한 바를 찾아보니, 경기전 외곽이 지금과 비슷한 풍경으로 바뀐 때를 1930년 전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멀게는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한 을사늑약(1905년) 이후 일본인들이 전주에 몰려들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 것이며, 처음 전주성의 서문 밖에 자리 잡은 그들이 성 안으로 진출하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한 성의 해체와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전주부성은 1907년에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全群街道)를 열면서 서쪽 성벽이 헐렸고, 1911년 말에는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마저 풍남문만 남기고 모두 헐어냄으로써 전주부와 그 외곽을 둘러싼 성곽은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성 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구역 개정에 의하여 전통시대 가로 방식과 축을 달리하는 바둑판식 구획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상인들이 전주의 상권을 크게 차지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은 해방이 될 때까지 줄곧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인들은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상권 잠식에 의한 세력 팽창에 반발하여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마을을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어가게 됩니다.

지금의 전주 한옥마을은 경기전을 중심으로 한 그 동쪽과 동남쪽 향교 사이의 교동 풍남동 일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이 비롯한 바라 해야 아직 100년도 되지 않은 젊은 곳이지만 이 또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속도전에 지친 현대인들이 이 곳을 고향처럼 찾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 전주는 그야말로 부흥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거리마다 사람이 넘쳐나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잠 잘 곳을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며, 이름난 맛집 앞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옥마을 전경. /최헌섭

◇오목대와 이목대

한옥마을에서 동남쪽으로 낮게 솟은 평평한 구릉이 오목대입니다. 이곳은 고려 말엽이던 1380년에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전북 운봉 황산(荒山)에서 아지발도가 이끌던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경으로 돌아가다가 승전 연회를 연 곳이라 전해지는 곳입니다.

당시 이성계는 이곳 관향에서 베푼 연회에서 한고조가 항우를 꺾고 그의 고향 패(沛)에서 연 개선연회에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를 호기롭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 노랫말이 "큰 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 텐가"라 했으니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뜻을 내비친 셈이지요.

그러자 이성계의 종사관이던 정몽주는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맞은바라기의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북쪽 하늘을 우러르며, "천길 바윗머리 돌길 기로질러/ 올라서니 이 마음 걷잡을 수 없네./ 청산을 다짐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이 흩날리어 백제성에 쌓였네. 구월 높은 바람에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만나니/ 고개 돌려 속절없이 옥경(玉京=개경)만 바라보네"라 읊으며 한숨지었다고 전합니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뒤 이곳에 누정을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했습니다. <여지도서> 에는 "발산(鉢山) 아래에 오목대가 평평하게 펼쳐 있다"고 했고, <한국지명총람>에는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언덕의 이름을 오목대라 했다는 지명 유래를 싣고 있습니다.

이목대(李木臺)는 오목대에서 육교를 통해 동쪽으로 기린대로를 건넌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태조 이성계의 고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살던 곳이라 전주 이씨의 관향이 비롯한 곳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여지도서> 전주 산천에 "발산은 관아의 동쪽 3리에 있다. 경기전의 지세에 으뜸이 되는 산줄기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목조의 집이 이 산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고 실려 있습니다.

또한 같은 책 고적에는 목조가 어린 시절 아이들을 모아 진법놀이를 익혔다는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虎隕石) 전설이 실려 있어 여기 발산 일원이 이성계의 선조가 세거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주에서 세거하던 이안사는 고려 고종(1213~1259) 후반기에 그가 아끼던 관기(官妓)의 일로 문제가 생겨 170여 호를 이끌고 삼척으로 옮기면서 전주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도 오목대 이목대를 둘러보고 향교 앞길을 지나 남천교를 건너 전주를 나섭니다.

인파로 붐비는 한옥마을. /최헌섭

◇전주를 나서다

옛 지도를 보면, 전주성 남쪽의 남천 가에는 중영(中營)이 있었던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진관제와는 별도로 운영한 진영 제도에 의해 설치된 것입니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 둔 다섯 진영 가운데 효종 때 이곳 전주에 설치하여 달리 중진영(中鎭營)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자리는 지금의 남천교 북쪽으로 헤아려지니, 이곳에 놓인 다리를 건너 전주를 벗어납니다.

이곳 남천은 예로부터 큰물이 지면 자주 넘치게 되므로 여러 차례 제방을 고쳐 쌓은 기사가 전해져 옵니다. <여지도서> 산천에 "남천은 관아의 남쪽 3리에 있다. 중종 기사년(1509)에 돌로 둑을 쌓아서 길이가 6000척이나 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무너져 내렸다. 비가 내릴 때마다 하천 물이 넘쳐흘러, 서남쪽 성 밖 거주민들이 홍수 피해를 입어 뿔뿔이 흩어졌다. 정조 갑진년(1784)에 관찰사 조시위가 둑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은 덕분에 홍수로 말미암은 재해가 비로소 그쳤다"고 전합니다.

이곳에 다리를 둔 것은 전주에서 임실을 거쳐 남원, 순창으로 오가는 교통의 요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오래 전부터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원래의 다리는 1753년 유실되어 1791년 8월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2월에 무지개다리로 완공하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다리의 모습을 보고 안경다리 또는 오룡교(五龍橋)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리가 다섯 개의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지도서> 교량에 "남천석교는 관아의 남쪽 3리에 있다. 예전에는 돌이 우뚝 솟은 평평한 다리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허물어졌다. 정조 신해년(1791)에 관찰사 정민시가 다시 손질해 규모를 바꾸어 무지개다리로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또한 이곳에는 오랜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남천교 개건비(南川橋 改建碑)가 세워져 있어 당시의 사정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 빗돌은 정조 18년(1794)에 처음 세웠다가 철종 13년(1862)에 다시 고쳐 세운 것인데, 비에는 건립 시기와 기금을 낸 군현별 명단,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비문 가운데는 "서산(지금 황방산)에서 돌을 가져다 8월에 시작해 12월에 완성했다"는 내용이 있어 채석 장소와 건립 기간을 알 수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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