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서버>에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와 폴란드 국민 5000명을 대상으로 유럽연합(EU)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조사, 분석한 기사가 실렸다. 가장 눈에 띈 건 영국과 나머지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쉽게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은 간극이었다. 영국인들의 42%가 EU의 존재에 부정적이었다. 반면 겨우 26%만이 EU의 회원국이어서 좋다고 응답했다. 폴란드 국민의 62%와 독일 국민의 55%가 EU는 자신들에게 이롭다고 대답한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차이였다.

기본적으로 영국인들은 미국에 훨씬 경도된 상태였다. 미국과 EU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어느 쪽에 서겠냐는 질문에 37%가 미국을 택한 반면 EU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10%에 불과했다. 반대로 독일인과 프랑스인 대다수는 영국이 EU에서 탈퇴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동안 EU와 미국에 양다리 걸치고 등거리 외교를 해온 영국에 대한 대륙인들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측된 모습이긴 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했던 영국은 해가 떨어진 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에 기대어 경제적, 외교적 실리를 취해왔다. 토니 블레어가 '부시의 푸들'로 불리면서까지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테러와 전쟁'에 참전한 건 중동 원유와 전후 복구 사업 등 미국이 흘려주는 '떡고물'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사이에 끼인 그들만의 생존법이었지만 국익이 전부인 '레알 폴리티크'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날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기사는 더 흥미로웠다. 이번엔 중국이었다. 제목 자체가 낯 뜨거웠다. 방중을 앞둔 카메론 총리가 "영국은 서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중국의 대변자가 되겠다"고 했다. 중국에도 확실하게 한 다리 걸치겠다는 의도였다.

중국·일본이 우리 관할구역인 이어도를 자국 방공식별구역에 포함해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은 이어도에 설치된 우리나라 해양과학기지. /연합뉴스

사실 그간 중국에 대한 영국의 구애는 뜨거웠다. 하지만 작년에 카메론 총리가 달라이 라마를 만난 이후 약간 소원해졌으니, 이번의 파격적인 입장 발표는 그 모든 오해를 일소하고 EU와 미국 그리고 중국에 걸친 다자 실리외교를 완성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인 셈이다. 실로 대단한 생존본능 아닌가.

비록 최근 들어 그 기세가 조금 꺾이긴 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줄곧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해 왔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의혹으로 내내 국정이 불안했음에도 그럴 수 있던 건 외교적 성과 덕분이란 게 공통된 평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취임 후 1년 간 이렇게 자주 외국을 나갔던 대통령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며 과연 그 성과의 실체가 무엇인지 근본적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오래전 저잣거리에서 유행했다던 "미국 사람 믿지 말고 소련 사람한테 속지마라. 일본 사람 일어난다. 조선 사람 조심하자"란 말이 자꾸 떠오른다. 소련을 중국으로, 조선을 한국으로만 바꾸면 어색함이 하나도 없는 말이니 대통령이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로 연설한 것과 한복 입고 건배하는 모습 그리고 자서전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게 마치 외교의 전부인 듯 뿌듯해하는 동안 미국과 중국, 일본의 전투기들이 으르렁대며 우리 영공을 드나들었다.

우린 그저 하늘만 멀뚱멀뚱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니 할 말이 이것밖에 없다. 한국 사람 조심하자.

/김갑수(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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