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지난주 강연 차 만났던 여고생들 얼굴은 고 3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하나같이 장래 꿈이나 진로에 대해 애매하고 무신경한 빛이었다. 이제 곧 세상이라는 녹록지 않은 바다에 뛰어들기 몇 달 전이라는 임박한 상황이라는 것도 그들에겐 그다지 큰 자극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능함이라 솔직히 말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분명히 그들 개인만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가정이나 학교 및 사회에서 빚어지는 구조적 문제가 근본적이긴 할 것이다.

통념적이고 타성적인 가면을 벗고 욕망의 민얼굴에 진실해지는 연습을 우리는 자라온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부족함을 느껴 무엇을 가지고자 또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본적인 욕심인 '욕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탐욕'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진정한 자신의 욕망이라 이름 부를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라고.

그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 단언하며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실은 타자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진단을 했다. 어떤 대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 대상의 내적 성질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욕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우리가 화폐나 아름다운 몸, 명예, 권력을 욕망하는 최초의 기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타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본연의 욕망을 정직하게 응시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타자,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는, 이 욕망의 과도한 경쟁 시대에 어떻게 진정한 욕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일제 치하 천재 시인 이상은 일부러 꺼려지는 혐오 음식만을 골라 먹었다고 한다. 맛있고 입맛에 맞는 음식들은 어쩌면 어릴 때부터 부모나 주변 사람들 입맛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진 타자의 폭력일지도 모르는 까닭에. 자신이 싫어하는 그 혐오스런 음식의 이상하고 낯선 맛이야말로 타자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자신 내면의 순수한 욕망의 맛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잃어버린 욕망을 찾아서, 음식 맛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의 보자기를 열어보고 싶어 했던 시인 이상의 고집스런 의지처럼 우리도 우리 내면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낯선 시선으로 응시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분명히 그것은 혐오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힘들고 긴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리라.

그러나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찾고 또 성찰할 시간을 가져보지 않는 한, 타자에 의한 폭력의 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서은주(양산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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