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움직이기 싫어합니다. 중학생인 딸과 아들, 자기 몸 관리 외에는 무신경입니다. 간혹 용돈벌이용 청소와 분리수거, 화분 물주기 등을 제외하면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기에 잔소리(?)가 최곱니다. 저도 기어코 폭발합니다.

"신발 좀 빨아 신어라. 너는 신발 더러운 거 안 보여?"

빨래방 등에 가져가 빨면 편리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는 버릇이 필요합니다. 아들은 잔소리가 몇 번이나 계속된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미적미적 일어나 하기 싫은 표정이 잔뜩 묻어난 얼굴입니다. 귀찮다는 듯 투덜투덜 신발을 들고 세면장으로 가더니 신발 끈을 풉니다.

그리고 신발 빨 준비를 합니다. 지켜보는 아빠 입장에서 무척 답답합니다. 세제를 풀어 물에 푹 담가 빨면 쉽게 빨릴 텐데, 그걸 모릅니다.

하나하나 일러주기보다 스스로 알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저 지켜보기만 합니다. 언제까지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법이니….

"왜 이리 때가 안지지?"

그럴 수밖에….

머리는 둬서 뭐 할까? 머리를 써야 손발이 고생 덜 하지요. 손으로 닦는다고 더러움이 쉽게 씻긴다면 뭐 하러 신발 빨아 신으라고 할까? 씻는 모습을 가만 보고 있으면 속 터질 것 같아 그냥 물러납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으니까.

깨끗하게 세탁한 아들의 신발.

"낼 운동화 신고 학교 가려면 빨리 말라야 하는데…."

기를 쓰고 빤 신발을 들고 세탁기로 향합니다. 그래도 탈수는 할 모양입니다. 도구를 이용할 줄 아는 '인간'임이 분명합니다. 아들이 탈수한 신발을 베란다에 놓았습니다. 때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신발을 본 아내 성에 차지 않습니다. 아내와 아들의 신경전이 시작됩니다.

"저게 빤 거야?"

"엄마, 내가 빤 거 몰라?"

"네 눈에는 깨끗하게 빨린 것 같아?! 이렇게 더러운 것 좀 봐!"

"깨끗하기만 하구먼. 괜히 그래."

가족 간 언쟁에서 한쪽 편을 드는 건 되도록 피합니다. 그랬다간 어느 한쪽의 원망을 뒤집어 써야 하니까. 이쯤에서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들도 자식 키우면서 이렇게 속 터졌을까?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야 부모님 속을 이해할 듯합니다. 역지사지. 자신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읽는 것이지요. 새벽에 일어나 신발을 만져보니 약간 덜 말랐습니다. 아들을 위한 아빠의 마음 씀씀이가 발동 직전입니다. 그래도 자기 손으로 빨았으니…. 하지만 망설이고 또 망설입니다.

'이걸 어쩌?'

고민하다 행동에 옮겼습니다. 딸의 드라이기로 신발을 말립니다. 뜨거운 바람이 신발과 손에 부딪칩니다. 잠시의 시간 투자로 신발 신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신발 끈은 아들에게 직접 묶어 신으라고 할까?'

이번에도 망설입니다. 학교가기 바쁜 아침, 아들에게 맡겼다간 지각할 게 뻔합니다. 아님, 아내의 요구가 있을 터. 또 행동에 나섰습니다. 결국 아들의 신발 끈 묶는데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아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이 웬일?"

이도 안 하면 가족이고 아빠일까? 간혹 한 번씩 해야 아빠의, 남편의 존재감이 생기는 법 아니겠어요? 신발 끈을 맨 후, 아들 발에 맞춰 끈을 묶어라 줍니다. 그제야 아들, 한 마디 하더군요.

"아빠~ 고마워!"

이렇게 한 가족이 됩니다.

/임현철(임현철의 알콩달콩 섬 이야기·http://blog.daum.net/limhyunc/1130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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