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3) 통영별로 19회차 - 전주(상)
오늘은 지난 여정을 마친 떡전에서 전주에 드는 여정입니다. 전통시대의 교통망을 이용할 수 있었던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떡전을 지나 숲정이에 이르면 멀리서 전주부의 읍성이 한 눈에 들었을 것입니다. 옛 지도를 기초로 살펴보면, 멀리 전주부성의 북서쪽 성벽, 북문과 그 문루인 공북루가 우리 길손을 맞이했겠지요. 전주는 저의 관향이기도 해서 즐겨찾기 시작하던 5~6년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경기전 주변의 한옥 마을을 중심으로 가로가 많이 정비되었고, 빈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건물이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곳 전주에는 우리가 꼼꼼하게 살펴야 할 역사문화경관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오늘 하루는 천천히 거닐면서 예스러운 것들을 찬찬히 살펴볼까 합니다.
◇'비사벌' 고증 필요
전주(全州)의 옛 연혁을 살피기 위해 <삼국사기> 지리지를 뒤졌더니, 전주는 옛 백제 때의 완산(完山)인데, 경덕왕 16년(757)에 전주라고 고쳤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는 완산을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비사벌과 비자화라면 우리 지역 창녕의 옛 이름이기도 해서 고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창녕의 옛 이름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화왕군은 본래 비자화군(비사벌이라고도 한다)인데, 진흥왕 16년에 주를 설치하고 하주(下州)라 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 어인 까닭으로 이곳 전주의 옛 이름이 비사벌 또는 비자화인지 궁금해질 수밖에요. 그래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따져 보았더니 후부 지명소에 넓은 벌을 이르는 벌(伐)이나 불 화(火)가 붙는 것은 신라 지역의 옛 이름에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옛 백제 땅의 이름에 이런 이름이 붙을 리 없으므로 아무래도 이것은 뒤에 기록되면서 빚어진 잘못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그 답은 이강래 선생의 글 <백제 비사벌고>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전국에 둔 6정의 하나인 완산정의 전신 하주정(下州停)과 진흥왕 16년(555)에 지금의 창녕에 두었던 하주(下州)와 혼동하여 빚어진 오류라는 것입니다.
◇전주를 거닐다
옛 통영별로는 곧장 전주부성으로 들지 않고 서문 밖으로 열린 길을 따라 전주천의 상류를 거슬러 난 길을 따라 남행을 거듭하지만, 오늘 우리는 옛 전주부성으로 듭니다. 전주에도 옛 부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객사와 풍남문이 남아 있어 전체적인 배치를 어림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객사 뒤쪽으로는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객사는 문루를 도로에 내어준 채 그대로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성종 4년(1473)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지을 때 쓰고 남은 재료로 서익헌(西翼軒)을 고쳐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중심 건물은 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관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두리기둥을 세워 지은 맞배지붕입니다. 주관의 이마에는 '풍패지관'이라 쓴 편액을 내걸었는데, 그 뜻은 <한국고전용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풍은 중국의 현명(縣名)이고 패는 중국의 군명(郡名)으로 한나라 시조 유방이 패군 풍현 중양리 출신이었던 까닭에 풍패는 건국 시조 또는 제왕의 고향을 지칭하게 되었음"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이 조선 왕조를 세운 왕가의 본향이므로 그에 빗대어 이런 편액을 내건 것이겠지요.
객사를 지나 남쪽으로 걸어내려 가면, 풍남문 동쪽에 이곳이 풍패지향(豊沛之鄕)임을 실증하는 조선 태조의 진영을 모신 경기전에 듭니다. 이곳을 <해동지도>에는 담장에 둘러싸인 경역에 두 건물을 그려두고 진전(眞殿)이라 적었습니다. 처음 태조의 진영을 그려서 모신 것은 태종 10년(1410)으로 이곳 전주와 경주 평양 등에 어진을 모시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다가 이태 뒤에 태조 진전이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이름인 경기전(慶基殿)은 세종 24년(1442)에 그렇게 고쳐 불렀고, 이때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경기전 경역 동쪽에는 성종 때인 1457년에 처음 지은 사고(史庫)가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 사고를 둔 것은 조선 왕실의 본향이자 태조의 진영을 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실록을 모실 건물이 마련된 것은 아니어서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처음 전주에 실록을 봉안한 것은 세종 27년(1445)의 일로 당시에는 성 안의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세조 10년(1464)에는 진남루(鎭南樓)로 옮겼습니다. 그 뒤 성종 3년(1472)에 세조와 예종 두 임금의 실록이 완성되자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면서 경기전 동쪽에 실록각 자리를 잡고, 이듬해 5월에 완성하여 6월에 모든 실록을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고가 소실될 위험에 처하자 경기전 참봉과 수직 유생이 힘써 정읍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다시 비래암으로 옮겨 병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한 모습으로 지금껏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 춘추관, 충주·성주의 사고가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고는 정유재란 때 소실된 뒤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다가 1991년에 다시 세웠는데, 그 형태는 고구려의 민간 가옥에 딸려 있던 창고인 부경을 닮았습니다.
경기전과 사고를 둘러보고 나오면, 바로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골목입니다. 이곳에서 경기전 앞을 지나는 길에는 사자 두 마리가 하마비(下馬碑)를 지고 있는 이채로운 석상이 눈에 듭니다. 사자가 지닌 용맹성 때문에 하마비의 받침대에 이를 형상화한 것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 눈에는 삽살개로 보이는데 어찌된 영문일까요. 하마비를 세운 전통은 조선 태종 때부터라 알려져 있는데, 문묘와 궐문의 앞에 표석을 세운 데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대개의 경우 갈형의 빗돌에 하마비 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깁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크든 작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입니다. 이곳의 하마비는 경기전을 중건한 광해군 6년(1614)에 세워진 것으로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 했으니 이곳에 이르면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새겨 격을 한층 더 신성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맞은쪽의 전동 성당을 지나 도로를 건너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당당한 위용을 갖춘 전주부성의 남쪽문인 풍남문을 만나게 됩니다. 전주읍성의 남문으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때 성곽과 성문을 중건하면서 명견루라 불렀다가 같은 임금 43년(1767)의 불탄 것을 이듬해 고쳐 짓고 풍패지향의 남문이란 의미로 풍남문이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문은 대개 성문에서 보듯이 성벽을 이루는 돌로 쌓은 기대(基臺) 가운데에 무지개 문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둔 구조입니다. 정면에서 보면 1층에 비해 2층의 너비가 갑자기 준 듯 여겨지는 것은 1층 안쪽 기둥을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깥에는 옹성을 돌려 적이 성 안으로 곧바로 짓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고, 그 양쪽으로 적대를 두어 방비 효과를 크게 끌어 올렸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