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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이 만난 사람]세계 유일의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

“개인적으론 이룰 건 다 이뤘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김주완 편집국장 wan@idomin.com 입력 : 2013-11-23 14:46:03 토     노출 : 2013-11-23 14:46:00 토

세계에서 유일한 가곡전수관이 경남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가곡(歌曲)이 우리 전통의 노래라는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대개 가곡이라 하면 ‘그리운 금강산’이나 ‘선구자’ ‘가고파’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건 서양음악이다.

진짜 가곡은 문화재청에 의해 중요무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전통 노래이며, 2010년 유네스코도 그 가치를 인정해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이 또한 모르는 사람이 많다.

<피플파워> 10월호에서 표지 인물로 소개된 호호국수 송미영 씨가 새 삶을 찾은 계기가 된 스승이 바로 이 가곡 예능보유자인 조순자(1944년생) 가곡전수관장이다.

그는 누구인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가곡은 과연 어떤 음악인지 알고 싶었고 기록해둘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인류의 유산이라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고 기록·전승은 물론 널리 보급해야 하는 게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2동 산복도로변에 있는 가곡전수관을 찾았다. 관장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내 마음으로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더 좋은 것 같아 그렇게 통일했다. 인터뷰는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순자 선생의 가족사와 성장과정, 그리고 객지 마산에서 국악계의 대가로 뿌리내리기까지 인생사를 더듬어 그의 진면목을 찾아내고, 일반인이 잘 몰랐던 인간문화재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주력했다.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박일호 기자  

조순자 선생은 일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목소리나 말투, 표정이나 인상도 반듯하고 단아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수틀리면 ‘한 성질’하는 사람이란 걸 기자는 알고 있다. 4년 전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의 아파트 주민자치위원회에 문제가 많으니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관심을 끄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그저 “예, 그런가요? 알겠습니다”는 정도로 나름 예의를 갖춰 응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도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달라는 요청이었지만, 그 후에도 역시 같은 핑계로 부응하진 못했다.

이후 엘리베이터나 게시판에 붙는 공지를 통해 선생의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존의 주민자치위원들과 한 때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가 싶더니 새롭게 동별 위원 투표가 진행됐고, 그는 비상대책위 임시의장이 되었다. 한동안 상호 비방과 소송이 오가는 것 같았으나 어느덧 평정되었고, 주민자치회는 새로운 위원들로 모두 교체됐다. 평소 몰랐던 그의 다혈질적 면모를 보게 된 계기였다.

전수관 건립은 제자들의 힘이었다

“찾아오는 게 힘들죠? 차 댈 곳도 부족하고…, 열 대밖에 못 세우니까. 공연이나 행사가 있을 땐 정말 불편하죠. 전수관이 바닷가 쪽에 있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러게요. 지금 해안도로 마산음악관 자리 정도라면 참 좋은데….

“그래도 이게 있다는 게 어딥니까? 그 때 윤병철이랑 그런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가곡전수관을 지어드리자’며 도민일보에 기고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래가지고 이게 지어진 겁니다.”

작곡가 윤병철(1960년생) 씨는 당시 경남도민일보 객원 음악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약 200여 건의 기사를 썼다. 2003년 2월 5일 자에 실린 ‘조순자 가곡전수관 만들자’는 칼럼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윤병철 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후 지금껏 회복하지 못한 채투병 중이다.

-그게 2003년도죠?

“네. 그 글이 계기가 되었죠. 물론 그 전에도 물밑에선 경남대 음악교육과 졸업생 제자들이나 창원대(당시 마산교대) 음악교육과 졸업생들, 그리고 학교 교사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있긴 했지만, 도민일보에 공식적으로 윤병철의 글이 실리고 난 뒤부터 정치하는 분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박일호 기자  

-윤병철 씨가 선생님의 제자였나요?

“그렇죠. 경남대 음악교육과…. 송철식(작곡가·음악 교사)과 동기예요. 둘이서 단짝으로 붙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되어서…. 아직도 회복을 못하고 있네요.”

-송철식 씨 형제들도 다들 음악을 했죠?

“그러니까 철식이부터 제가 가르친 게 인연이 되어서 동생 철민, 철훈, 철규 모두 2006년도에 여기 함께 있었죠. 그러다가 개별적으로 다 나가고….”

-나가서 지금은 다들 뭐하죠?

“철민이는 대금을 했는데 경북대를 나와 지금 경남국악관현악단 ‘휴’ 단장으로 있고, 철규는 경북도립관현악단 대금 주자로 있죠. 철훈이는 피리를 했는데, 지금은 악기제조업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경원, 이은아, 성의신 등 좋은 제자가 많은데, 성의신은 해금주자죠. 그 때 해금이 뭔지도 모를 때였는데, 마산여중 출신으로 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 국악과를 나와 KBS 국악관현안단 초창기 멤버로 지금 최고의 해금 주자가 되어있습니다. 지금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교수하고 있고요. 그 제자가 진해 출신으로 김애라라고 해금하는 아이가 있어요.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서 해금을 연주한 강은일 서울예술대 교수로 있고, 김성아 한양대 국악과 교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강은일, 김성아는 성의신의 제자이고, 성의신은 선생님 제자시고?

“네, 그렇죠. 그렇게 제자가 제자를 키우면서 저변을 넓히고 있죠. 김애라 이런 아이들은 정말 국악계에선 싸이 정도로 엄청나게 유명한 주자예요.”

-그게 1970년 결혼 후 마산에 와서 경남대와 창원대(당시 마산교대) 음악교육학과 제자들로부터 시작됐다는 거죠?

“그렇죠. 73년부터 거기서 국악개론을 가르쳤는데, 이론만 가르치다 보니 ‘이건 안 되겠다. 음악교사가 될 사람들이 장단을 알아야 한다’ 싶었죠. 그런데 장구가 없잖아요. 그래서 라면 박스를 갖고 장구 치는 연습을 했어요. 비닐우산 대나무 우산대를 다듬어 장구채로 사용했죠. 그런데 73학번 중에서 볼링선수가 된 박세익이라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장구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나중엔 그걸 좀 갖고 오라고 해서 장구를 가르치기도 했죠. 그리고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구분을 하는데, 가야금과 거문고를 구분 못해요. 그래서 국립국악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그걸 슬라이드로 만들었어요. 지금도 그 슬라이드가 있어요. 73학번부터 모두 그 슬라이드를 보면서 국악개론 공부를 했죠. 책으로만 봐선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서로 마음이 통했나 봐요. 그 때 학생들이 지금은 오십이 다 넘었는데,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죠. 가곡전수관 건립도 그 때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각계에 호소도 하고….”

-그래서 가곡전수관 건립으로 이어진 거로군요.

“그 때 음악교육학과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계기는 윤병철이 쓴 도민일보 칼럼이었어요. 그 칼럼을 들고 다니며 교육청과 각계에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저에게는 경남대학교 음악교육학과 학생들이 지금도 귀해요.”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박일호 기자  

교사가 된 제자들을 다시 가르치다

-당시 경남대와 마산교대에서 강의를 맡게 된 건 당시 마산교대 박종원 교수와 인연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있던데.

“아! 그분은 서울음대 양악과에서 호른을 분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서울대를 안 나왔는데 이혜구 선생님과 장사훈 선생님이 워낙 저를 예뻐하니까 박종원 교수가 저를 본 거예요. 그 때 저를 서울음대 선배인 줄 알았대요. 그래서 73학번들 가르쳐야 하는데 국악 가르칠 사람이 없다니 저를 부른 거죠.”

-이후 국악교육연구회를 만들어 현직 교사들을 가르치기도 하셨다는데?

“나중에 졸업생들을 만났는데, 대학에서 배웠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 그래서 내가 잘못 가르쳤구나. 그러면 73학번부터 모두 리콜이다 하여 불러 모았어요. 그 때 제가 창포 경남아파트 살 때였는데, 아파트가 좀 넓었어요. 거기서 음악교사들을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강만호(현 경남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등 경상대 출신들이 우리도 끼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국악교육연구회 출신 제자들도 가곡전수관을 만드는데 다들 한몫씩 했죠.”

-국악교육연구회가 76년에 만들어졌죠?

“75년에 서울에서 장사훈 박사와 함께 만들었죠. 제가 거기 발기인이에요. 그러고 나서 76년에 경남에서 만들 때 제 선생님이었던 이혜구 선생님과 윤태림 당시 경남대 총장님이 ‘절친’이었어요. 그리고 김종신, 조두남 이런 분들이 고문을 해주셨어요. 이렇게 해가지고 경남국악교육연구회가 발족하게 되죠. 그 때 윤태림 총장님을 통해 알게 된 분이 지금 경남신문 회장이신 정충견 교수였죠. 그 분이 지금도 그 때 상황을 알고 계세요. 만났더니 참 반갑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결국 그런 제자들 덕분에 가곡전수관이 마산에 세워지게 된 거로군요.

“그래서 제가 다른 데서 오라고 해도 마산을 떠날 수가 없어요. 가곡은 중요무형문화재 30호이고 개인종목인데, 개인종목을 국가에서 이렇게 해준 건 전무했답니다.”

-개인종목이라는 말은?

“농청놀이라든지, 종묘제례악이라든지, 밀양백중놀이라든지 그런 것처럼 단체종목이 아니라는 거죠. 이런 종목은 함께 모여서 연습할 데가 없으니까 나라에서 전수관을 지어줬어요. 그런데 개인 종목은 ‘너희 집에서 해라’며 해주지 않았는데, 실상을 보면 그게 잘못된 차별이죠. 개인종목이 어떻게 보면 더 전문성과 예술성을 갖고 한 사람의 일생을 바쳐야 하는 거거든요. 기예이든, 기능이든, 예능이든 개인종목은 어릴 때부터 평생을 해야 하고, 전수자로 길러내야 하는데…. 그래서 박동진, 강선영 선생도 전수관을 자기 돈으로 지었어요. 하지만 이 가곡전수관은 나라에서 지었지만 소유권은 마산시로 넘어갔어요. 조순자 개인 것이 아니에요.”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박일호 기자  

여전히 힘겨운 전수관 운영

-운영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처음엔 기본적인 전기세, 물세 보조도 없었어요. 지금은 그 정도 지원은 받지만 인건비가 없어요. 청소하는 사람도 없어서 제가 해야 하고…. 이런 사정을 알고 대우백화점 점장을 하시던 정한동 씨가 깃발을 든 거예요. 사단법인을 만들어서 가곡전수관을 돕는 일을 하자. 2010년 가곡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뒤였어요. 경남에 많은 예술단체나 예술인이 있지만, 세계유산이 된 건 가곡이 유일하지 않느냐? 그래서 이사를 모으고 ‘사단법인 아름다운우리가곡’이 만들어진 거죠.”

-지금 한철수 전 마산상의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죠?

“그렇죠. 처음엔 절 보고 이사장을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가곡전수관을 도와주는 법인을 만드신다는 데, 내가 거기 있으면 안 된다고 했죠. 나도 거기 십시일반하겠다. 그래서 등기이사들은 1000만 원씩 내더라고요. 저도 1000만 원을 냈어요. 그래서 연주단도 거기서 봉급을 주고 있죠.”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을 텐데요.

“그래서 끊임없이 사업 응모를 해야 하죠. 그게 참 힘들어요. 가르치고 연주하는 본연의 일에 몰두해야 하는데…. 메세나에서도 지원을 받는데, 한철수 이사장이 해줬어요. 처음엔 예비 사회적 기업도 해봤어요. 노동부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서 했는데, 해보니까 도둑놈 취급을 하는 거예요. 별안간에 쳐들어와서 출퇴근 시간 점검을 한다면서…. 우리는 오전 11시나 오후 1시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오전 9시 출근해서 6시까지는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왜 이러느냐, 우리 도둑놈 아니다, 그랬더니 그 분들도 애로가 있더라고요. 유령직원을 이름만 올려놓고 끼리끼리 해먹는 곳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지원 안 받겠다고 했어요. 조금 어렵더라도 상근으로 있던 연주자를 비상근으로 돌리고, 1시 출근해서 6시까지 하고, 상근은 몇 명만 두고…. 그렇게 바꿨어요.”

-연주단이 몇 명이나 되나요?

“최소 인원으로 해도 열여덟은 있어야 해요. 가곡을 반주하려면 일곱 명이 있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계속할 수 없으니까 번갈아가면서 2명씩 복수로 있어야 하죠. 그러면 열네 명에다가 노래하는 사람까지 합쳐서….”

-예를 들어 대금 두 명, 뭐 이런 식으로?

“그렇죠. 대금 둘, 피리 둘, 해금 둘, 가야금 둘, 거문고 둘, 장고 둘, 단소 둘 이런 식으로 해서 그렇게 되어야 가곡을 연주할 수 있어요. 거기에다 노래하는 남창, 여창 각 두 명씩이 있어야 하죠.”

-그러면 지금 가곡전수관에 그 열여덟 명이 항시 있나요?

“그들에게 최저임금이라도 주려면 대체 얼마나 돈이 있어야 하겠어요? 또 4대 보험도 들어줘야 하고, 그런데 그러려면 기업주가 부담해야 하는데, 이게 이익 남는 기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18명을 못 채우고 있죠. 그거 다 채우려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팔아야 해요.(웃음) 그냥 모자라면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하고…. 이렇게 겨우 겨우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 무슨 뭐 도립예술단을 만드니 뭐니 하는 이야기 들으면 기가 차죠. 그냥 아무 말 않고 있어요.”

-그러면 현재는 몇 분 정도?

“지금 비상근으로 열 명. 상근이 두 명, 열두 명으로 하고 있으니 많이 힘들죠. 그리고 사범 두 분이 무료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해주고 있죠. 그리고 국립국악원과 MOU를 체결해 필요한 게 있으면 와서 해달라고 해서 하고 있는데….”

-국립국악원이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지방에도 있나요?

“부산에 하나 있고, 전남 진도와 전북 남원에 하나씩 있어요. 그런데 더 많이 생겨야 합니다. 국립박물관은 가는 데마다 있잖아요. 경남에도 있어야 합니다.”

-가곡전수관이 국립국악원 분원 역할을 한다는 보도를 봤는데요.

“그렇습니다. 그게 MOU 체결 내용입니다. 그 역할을 일부 하는데, 이걸로는 제대로 국악원 역할을 할 수 없죠.”

-상근 연주자가 2명뿐이라고 하셨는데, 사무실에 있던 분은 누굽니까?

“그들이 연주단원이면서 상근 행정업무를 겸하고 있는 거죠. 사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연주자는 연주만 하고, 행정업무는 별도로 채용해야 하는데, 앞으론 그렇게 할 겁니다. 참 그러고 보니 사무국장(신용호)도 연주를 하고 있지만 상근자로 봐야겠네요. 사실상 세 명이죠.”

-신용호 사무국장은 아드님이죠?

“제 아들이 건축과를 나와서 대학 건축과에 있는 걸 잡아들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걸 좋아했었거든요. 그래서 너 좋아하는 걸 지금이라도 하라고 했죠.”

-아! 어릴 때부터 좋아했군요.

“당연하죠. 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었는데…. 그런데 우리 시집에서 종갓집 종손이 노래를 해선 안 된다고 해가지고 못하게 했잖아요. 어릴 때부터 트럼펫을 아주 잘했는데, 전공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주고 했습니다. 63회 전국체전이 경남에서 열렸을 때 트럼펫 주자로 차출되기도 했어요. 성호초등학교 때였는데, 그 때 마칭밴드 리더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대학에 있는 걸 데려와서 사무국장을 시켜놨는데, 월급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월급을 대신 줍니다.”

-아버지가요?

“내가 신 씨 집안에 시집 와서 인간문화재까지 됐으면 이제는 시집에서도 뭔가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들도 하고 싶은 걸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하려고 왔으니까 아버지가 대신 월급 좀 주라고 했죠.”(웃음)

-건축과 나와서 뭘 하고 있었나요?

“교수하고 있었잖아요. 울산과학대.”

-둘째 아들(신용승)은 어디 있나요?

“얘는 수의학과를 나와 미국 와이오밍주립대에 있다가 귀국하여 지금은 수원에 있는 외국계기업 한국지사에 있어요.”

서울 토박이가 마산에 뿌리내린 까닭

-부군은 지금도 사업을 하십니까?

“안 하시죠. 집세만 받아먹고 살아요. 자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해요.”

-부군이 신영준 씨죠? 1970년에 결혼하신 걸로 되어 있던데, 어떻게 만난 건가요?

“마산 사람인데 서울에서 대학 다니다 어쩌다 미팅에서 만났는데,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그 땐 제가 국립국악원에 연주원이면서 건국대 생활미술과 야간을 다녔는데, 계속해서 국악원에 찾아오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군대를 갔죠. 그 후 제가 인천 인화여고 교사로 스카우트가 되어 갔어요. 거기 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학교로 올라오는 거예요. 깜짝 놀라 알고 보니 그 학교 수학 교사로 왔더라고….(웃음) 제가 거기 있다는 걸 친구에게 듣고 알았나 봐요. 그래서 70년에 결혼을 했는데, 곧 마산으로 오게 됐죠.”

-그러면 일부러 선생님이 있는 인화여고 교사로 온 거네요?

“그렇죠.(웃음) 결혼하자마자 딱 그만두고….”(다시 웃음)

-마산으로 오게 된 것은?

“여기 적현동에서 봉암석산을 운영하시던 시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그래서 그 사업을 이어받으려고 불려왔죠.”

   
  중학시절 동기들과 함께(왼쪽에서 네 번째가 조순자 관장)./조순자 관장 제공  

-봉암석산이 골재채취업이죠? 그걸로 돈을 좀 버셨나요?

“엄청 벌었죠. 그 때 수출자유지역 매립을 다 그걸로 했으니까.”

-그렇게 돈도 많이 벌었는데, 국악을 생계수단으로만 생각했으면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었을 거잖아요.

“그런데 그 계기가 된 게 경남대 음악교육과에 강의를 하게 된 거였어요. 기가 찼어요. 음악교사가 될 학생들인데 서양음악밖에 모르고…. 그래서 쇼크를 받은 거예요. 이래선 안 된다는 자극이 됐죠.”

-그 때문에 또 열 받았군요.

“제가 안 그런 것 같지만, 어떤 계기가 오면 분기탱천하는 그런 성격이 있어요. 그럴 땐 아무도 못 말려요. 아파트 비상대책위도 그래서 했잖아요. 이건 아니다 싶으면 물불을 안 가려요. 그러면 저는 끝을 보는 성격이에요.”(웃음)

-시아버지는 70년 그 때 돌아가시고?

“아니, 그 이후에 돌아가셨죠. 시어머니는 중성동 산촌한정식 뒤 주택에 사셨는데, 아파트에서 사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지금 제가 사는 아파트를 분양받았죠. 그런데 시어머니도 결국 아파트 완공 전에 돌아가셨죠.”

-그러면 시어머니는 돌아가신지 몇 년 지나지 않았네요?

“그렇죠. 2010년 입주 전이죠. 저희 시어머니도 유명하신 분이에요. 진주 일신여고(진주여고의 옛 이름) 출신이거든요. 소설가 박경리 선배예요. 저희 시아버지도 유명하셨고….”

-친정 이야기도 좀 해보죠. 친정아버지는 경찰관이셨다고요?

“네.”

-원래 아버지 고향도 서울이었나요?

“서울이죠. 본관은 창녕인데요. 일찍이 서울서 자라셨죠.”

-6·25 때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었다던데.

“네, 해방되고 어지러웠던 시절에 공안검사 출신 조재천(이후 법무부 장관) 씨가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어서 그 인연으로 경찰에 가셨는데, 6·25 때 거의 죽다 살아났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따발총 다 기억하고….”

-그 때 경찰이라서 인민군에 붙잡힌 겁니까?

“우리가 빨리 피난을 갔어야 했는데, 그 때 저희 오빠(작고)가 서울중학교 학생이었어요. 놀다가 초여름 흰 교복에 콜타르를 묻혔나 봐요. 그 때 저희 집이 을지로에 있는 2층집이었는데, 우리는 2층에서 생활하고, 1층에 약제실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서 몰래 알코올로 콜타르를 지우려 했나 봐요. 그 때 하필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켜려다 양 다리에 불이 붙은 거예요. 화상을 입은 거죠. 오빠가 독자였거든요. 1남 3녀 중 막내 여동생은 6·25 이후에 태어났고, 그 땐 제가 막내였어요. 오빠는 열네 살, 나는 일곱 살이었죠. 그 때 기억이 나요. 그 때문에 피난을 못 간 거예요. 그래서 현관문 앞 꽃밭을 파서 항아리 속에 경찰 신분증과 모자 그런 걸 묻었어요.”

-그래서 온 가족이 다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있었던 거네요? 그러다 인민군에게 붙잡힌 것은?

“그건 도강을 하여, 지금으로 보면 강남이죠. 거기서 잡힌 거예요. 지금 기억나는 건 밥도 안 주니까 우리가 도시락을 싸 갔는데, 아버지가 빈 도시락 속에 메모를 써서 보냈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노동당 위원장 유인모를 찾아가라’고 되어 있었죠. 그런데 상해임시정부 때 무슨 시집 이런 게 있었어요. 시 한 수 쓰고 자기 이름 적고 뭐 그런 거였는데, ‘그걸 가지고 가서 유인모에게 줘라’, 상해에서 같이 하던 친구가 노동당 위원장이 되어서 왔다고 하더라 그런 말이었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건가요?

“잘은 모르지만 뭐 그런 단체에 있었나 봐요. 해방 전에 서울에서 간이학교를 만들어 아이들도 가르치고 하셨으니까.”

-어쨌든 상해임시정부와 관련된 뭔가를 들고 유인모를 찾아가면 아버지를 살려줄 지도 모른다 그런 말이네요.

“네. 그래서 어머니가 찾아갔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사적인 일이냐, 공적인 일이냐’고 물어서 사적이라고 했더니 문도 안 열어주더랍니다. 그러나 가져간 것은 어떻게든 전달을 했는데 그냥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젠 죽었구나 하고 밤길을 걸어 집에 왔는데, 먼동이 틀 무렵 우리 언니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더라네요. ‘현숙아, 현숙아’ 하면서…. 그렇게 우리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어요.”

-그건 어머니께 들은 거죠?

“그렇죠. 그런데 아버지도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풀어주면서 ‘내일 모두 도장을 들고 내무서에 모이라’고 했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뭔가를 직감하고 안 가신 거죠. 그런데 간 사람은 한 구덩이에 넣고 다 죽였어요. 아버지 혼자만 사신 거죠.”

-그 후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신 건가요?

“전쟁 끝나고 다른 사업을 하시다가 회갑 겨우 지나고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그보다 먼저 돌아가셨어요. 천생연분이었나 봐. 그 후 저는 엄마 아버지도 없이 자랐죠. 제 결혼 때도 6·25 때 화상 입으셨던 오빠가 데려다 줬죠.”

-오빠는 이후 뭘 하셨나요?

“서양화가였어요. 홍익대 출신 ‘장안회’ 회원으로 인사동에서 전시를 많이 했죠. 그 오빠 영향으로….”

열네 살 소녀, 국악에 빠지다

-아, 그래서 생활미술과로 진학하셨군요. 음악에 대한 재능은 누구 영향이었을까요?

“아버지가 가무와 시(詩)를 좋아하셨어요. 기생집에서 노래도 하고 단가도 부르고…. 친구 분들과 노실 때도 처사가도 부르고 퉁소도 부는 걸 봤어요. 아버지가 일제 때 보성전문 출신이셨거든요. 당시 지식계급에 속했던 아버지와 친구 분들이 풍류를 즐기는 걸 보고 자라서인지 국악이나 기생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도 유치원 때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걸 잘했어요. 아버지와 친구 분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고 자랐죠.”

-그 시절에 유치원도 다니셨다고요?

“을지로 6가에 유치원이 있었어요.”

-아래 여동생은 지금?

“전쟁 통에 태어났는데, 지금 대구에서 목사로 있어요.”

-졸업하신 명성여고는 어떤 곳입니까?

“지금은 없어졌어요. 동국대학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였는데요. 영등포국민학교를 거져 수도여중을 다녔어요. 그런데 KBS(당시 서울중앙방송) 국악연구생에 지원을 해서 합격을 했어요. 이거 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 하는데….(웃음) 그런데 그 명성이라는 학교가 좀 악명이 높았어요. 4대 극성이라는 말도 들었던 학교였는데, 야간학교였어요. 제가 낮에는 국악연구생으로 방송국에 가야 하니까 야간학교를 가야했던 거죠.”

   
  국립국악원 앞마당에서 대금잡이 세 명(왼쪽이 조순자 관장)./조순자 관장 제공  

-그러면 중학교 마치고 바로 국악연구생으로 지원하신 거네요?

“그렇죠. 중졸 이상 자격이었으니까. 기록에 보니까 국악연구생 2기를 58년에 뽑았더라고요.”

-열네 살의 나이에 어떻게 국악연구생으로 갈 생각을 했나요?

“앞에서 말했듯이 아버지 영향도 있었고, 사실은 KBS 국악연구생 1기 중에 외사촌 언니가 이영숙이라고 있었어요. 그 언니 하는 걸 보니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2기생 응모하는 걸 보고 갔죠. 수많은 사람이 왔는데, 아마 국악원에서 모집했으면 그렇게 많이 안 왔을 거예요. 기생 된다고…. 그런데 방송국에서 하니까.”

-그러면 선생님이 44년생이니까 그 때 같으면 만으로 열네 살인데,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간 건가요?

“그랬죠. 고등학교도 한 해 월반을 했어요. 그 땐 낙제도 있고, 월반도 있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대학은 왜 음악 쪽으로 안 가고 생활미술과를 갔습니까?

“대학 진학할 때는 또 국립국악원 연구원으로 가게 됐는데, 처음엔 서라벌예대에 가려고 했어요. 그 때 우리는 이미 공연도 하는데, 거기 신입생으로 가서 춤만 배워서 뭘 하겠냐는 생각이었어요. 게다가 거긴 주간이었고…. 그런데 인사동 가기 전 낙원동에 건국대 캠퍼스가 있었는데, 야간인 거예요. 그래서 화가인 오빠의 영향도 있고 거기 생활미술과로 간 거죠. 그런데 생활미술과에 배울 게 진짜 많았어요.”

-1961년부터 국립국악원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그게 직장 개념도 되는 거였나요?

“그렇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공연도 했는데요. 당시 3만 원이면 화폐개혁 이후 상당히 큰 돈이었어요.”

-국립국악원 연구원은 어떤 사람을 뽑았나요?

“지금의 국악중고등학교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라는 게 있었는데, 6년 과정이었어요. 모두 국비로 교육을 시켰죠. 1961년에 첫 졸업생이 나왔는데, 그들 중에서 연구원들을 뽑았죠. 저는 국악사양성소 출신은 아니고 KBS 국악연구생 동기들과 함께 가게 된 거죠.”

-한 기록에 보니 ‘오전에는 김천흥에게 춤을 배우고 나면 오후에 성금련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우고, 또 이창배에게 경·서도 소리를 배웠다’고 되어 있던데, 이건 국립국악원 때가 아니고?

“KBS 연구생 시절이었죠.”

-그러면 선생님이 이 분야의 재능을 인정받은 게 KBS 시절이었군요.

“그렇죠. 제가 KBS 연구생 시절 국악사양성소에 가봤더니 민속악을 안 가르쳐요. 조선시대 이왕직아악부에서 있었던 궁중음악만 가르치는 거예요. 아리랑도 못해. 그런데 KBS에서는 민속악과 정악 다 배웠거든요. 그런 저와 제 동기들이 그리로 들어가니까 국악원이 뒤집어졌어요.”

-그러니까 당시에는 가곡 하나만 하신 게 아니라 노래와 춤과 악기를 다 하신 거네요?

“그렇죠. 춤도 여러 가지를 해야 하고, 악기도 합주를 해야 하니까 공통필수로 가야금은 다 해야죠. 병창을 해야 하니까. 일일이 악기에 대한 스킬을 다 배워야 해요.”

-그냥 장구는 알겠는데, 설장구라는 건 뭡니까?

“서서 설치면서 하는 거라고 설장구라고 하죠. 설장구를 하고 나면 그냥 장구춤은 싱거워서 못해요. 그것도 그쪽의 대가들에게 배웠죠. 설장구는 이정범, 꽹과리나 소고춤은 황재기라든지 이런 대가들이 강사로 왔습니다. 그 땐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이런 개념도 없었고, 그 분들이 참 힘들게 사시던 때였는데, 방송국에서 강사로 초빙했죠.”

1964년 일본 공연 계기 가곡의 길로…

-그렇게 국립국악원에 67년까지 계시면서 일본 공연, 대만 공연 등을 다니셨죠? 1964년 20세의 나이에 일본에서 이주환과 ‘태평가’를 불렀다고 하던데….

“사실 그 땐 가곡이 싫었어요.(웃음) 판소리나 민요가 좋았고…. 그런데 이주환 선생님이 이걸 하라는 거예요. 엄청 무서운 선생님이셨는데, 1964년이면 한일국교정상화(1965년)도 되기 전이었죠. 요미우리신문사 초청으로 갔는데, ‘춘면곡’이라는 가사를 독창하고, 선생님과 이중창을 하는데 ‘태평가’를 한 거죠. 잘하지도 못하는데 그런 대가와 함께 했다는 게 저로선 영광이죠. 제 실력에 맞지 않게 그걸로 뜬 거죠.”

   
  1964년 일본공연 기념촬영./조순자 관장 제공  
   
  1964년 일본 공연 당시 스승 이주환과 '태평가' 공연 모습./조순자 관장 제공  

-국립국악원을 그만 두고 1968년 인화여고에는 국악교사로 간 건가요?

“당시 인화여고 백인엽 이사장이 1인 1기 교육 이런 걸 많이 시켰어요. 그래서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었는데, 국립국악원에서 저를 추천해서 가게 된 거죠. 그런데 국악만 할 수 없으니까 미술과목과 음악과목을 함께 맡았죠. 학생은 많고 교사는 모자라고 그러니까 국어를 가르친 적도 있었어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있다가 결혼 후 그만두고 여기로 온 거죠.”

이 대목에서 ‘정가’ ‘정악’ ‘아악’ ‘가사’ ‘가곡’ ‘시조’ 등 용어의 개념을 물었다. 이때부터 국악의 역사부터 용어 구분의 문제 등에 대해 약 20분간 ‘강의’를 들었다. 옮겨 기록해둘만한 중요한 내용이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국악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가곡전수관에서 하고 있는 대중을 위한 공연에 가보기를 권한다. 나도 따로 시간을 내어서라도 가볼 참이다.

-KBS 국악연구생 출신 중에 선생님처럼 국악에 대가를 이룬 분이 또 있나요?

“없어요. 현역엔 저만 남았어요. 인간문화재는 저 혼자 됐고요. 경북대 국악과에 가야금 전공 교수로 한 분 있었는데, 작년에 정년퇴직을 하고 또 접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면 이걸 전승할 사람도 갈수록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제가 신영준이라는 남자 때문에 경남에 시집와서(웃음) 여기에 뼈를 묻게 됐는데, 이것도 인연이죠. 그런데 저도 이제 소멸되잖아요. 나이가 이제 칠십인데 언제까지 이 목소리가 나오겠는가? 그래서 사실 급해요. 특목고를 만든다, 예술고를 만든다? 그런 것보다 급한 게 이거예요. 제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그 교육을 받은 게 저 혼자라는 것, 아직 소리를 낸다는 것, 그걸 좀 활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영송당(永松堂)이라는 호는 어떻게 지으신 겁니까?

“제가 교원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잖아요. 거기서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요. 그 때 숭실대 국문학과에 고대 시가를 전공한 조규익 교수라는 분이, 이거 적으세요. 기록해야 해요.(웃음) 그 분이 시를 한 편 지어주면서 ‘선생님 이름을 조순자, 조순자 이렇게 부르는 것도 미안해서 호를 만들었다’면서 영송당이라는 호를 지어준 거예요. 제 소리가 솔바람 소리 같다면서 ‘영송헌시’를 줬는데, 영송헌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영송당’이라 부르겠다는 거죠. 그 시를 교원대 대학원생들이 만든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그 때부터 홈페이지 제목이 영송헌이 됐고, 제 당호가 영송당이 된 거죠.”

   
  스승 이주환과 공연하는 모습./조순자 관장 제공  

유네스코 등재 과정의 비화

-2001년도에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받았잖아요? 예능보유자와 인간문화재는 다른 겁니까?

“아뇨. 같은 거예요. 예능보유자가 공식 명칭이고, 인간문화재는 예우하는 차원에서 부르는 명칭이죠.”

-예능보유자가 되면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게 있나요?

“전승지원비라고 해서 매월 100만 원을 주는데 취약종목은 그보다 좀 더 줍니다. 취약종목이 아닌 경우는 좀 덜 주기도 하고…. 그 분들은 인기가 높으니 돈도 많이 벌 수 있잖아요.(웃음) 저는 165만 원을 받아요. 그런데 학술원이나 예술원은 더 많이 줘요. 그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도 있죠. 그것도 차별이잖아요.”

   
  검무 공연 모습(맨 오른쪽이 조순자 관장)./조순자 관장 제공  

-가곡이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잖아요. ‘권고 등재’가 되었다는데, 그런 무슨 뜻인가요?

“이번에 아리랑도 유네스코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권고 등재했듯이 가곡도 그렇게 된 거죠. 저도 사실 2003년 판소리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걸 보고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나라 3대 성악이 가곡, 판소리, 범패인데 가곡도 세계에 알려야겠구나. 그 후 프랑스도 가고, 미국도 가고 하면서 가곡을 알리는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서양음악을 하다가 가곡을 배워 뉴질랜드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제자가 있어요. 그 제자에게 영문으로 가곡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게 하고 음반을 유네스코 위원들이 있는 대학에 보내기 시작했죠.”

-그러면 우리 문화재청에서 가곡을 등재해달라고 신청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죠. 유네스코에서 먼저 알고 권고 등재를 하게 된 거죠. 90년대에 MBC 김사숙 피디와 ‘가곡의 원류를 찾아서’ 프로그램도 했는데, 그런 것까지 자료를 다 보낸 거예요.”

-유네스코에 이렇게 등재가 되면 거기서 뭔가 지원되는 게 있나요?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명예죠.”

   
  2003년 창작가무극 '도화 뜬 맑은물에' 공연 모습./조순자 관장 제공  

-하지만 세계에서 인정한 인류유산이니 해당 국가에서 잘 전승 보존하라는 의무감을 부여하는 효과는 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특히나 경상남도에서는 안 하잖아요. 중앙문화재니까 굳이 마산에서 안 해도 돼요. 전주에 국립무형유산원이 생겼잖아요? 전주에서도 오라고 해요. 거기에도 가긴 갈 거예요. 저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해서 거기 가서도 가르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된 판인지 경남의 권력자들은 문화에 대한 이해과 관심도가 너무 낮아요. 전라도는 판소리 하나 갖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 경남은 그냥 내버려두고 있잖아요. 가곡은 판소리까지 다 아우르는데….”

국악으로 인간문화재가 되려면…

-가곡전수관에서도 일반인 상대 강습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나요?

“가곡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국악 전 분야를 다 가르치고 있죠. 토요일에 영송헌 아카데미라고 해서 일반인들이 오면 아주 실비로 강습을 하고 있어요. 문화강좌 그런데서 몇 십만 원씩 주고 비싸게 배울 일이 아니죠. 여기 오면 되는데…. 여기서도 수료증 주고 다 해요.”

-문하생, 전수생, 이수자의 차이는 뭔가요?

“문하생은 내가 이걸 계통을 밟아서 이수를 받지 않고 취미로 배우겠다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수생은 이수를 받아서 예능보유자까지 도전해보겠다는 사람이고요. 전수생으로 있다가 시험을 보겠다고 하면 학위 받는 것처럼 심사위원들 모셔서 이수 발표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합격해야 하죠. 5단계 평점이 있습니다.”

   
  2004년 가야국악회관 관장 시절./조순자 관장 제공  

-전수생이 이수자 시험을 칠 때는 누가 심사위원이 됩니까?

“저는 당연히 심사위원이 되고요. 다른 데서도 심사위원들이 옵니다.”

-그 시험은 문화재청이나 국립국악원에 가서 하나요?

“여기서 해요. 여기 전수관이 있으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선생님이 배출한 이수자와 전수생, 문하생은 몇 분이나 되나요?

“(손으로 한 명 한 명을 꼽더니) 이수자는 여덟 명이네요.”

-그러면 그 분들은 이수를 받고 나면 뭘 합니까?

“여기 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제 지도를 받고요. 1년에 두 번, 하계와 동계 때 열흘 이상 여기서 숙식을 하면서 집중교육을 또 받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뤄지는 모든 연주에 의무적으로 출연을 해야 해요. 그런 경력이 쌓이게 되잖아요? 그러면 제가 더 못 하거나 죽게 되면 그런 게 스펙이 되는 거죠. 이 종목에 대한 공헌도도 있어야 하고….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노래를 시켜봅니다. 시험을 치는 거죠. 그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이 제 다음으로 예능보유자가 되는 거예요.”

   
  조순자 관장 2009년 공연 모습./조순자 관장 제공  

-그러면 선생님을 이어갈 인간문화재는 딱 한 명이 되는 건가요?

“그렇죠. 그런데 제가 문화재청에 이야기한 말이 이수자에게는 그만큼 국가에서 대우를 해줘라. 사실 박사학위를 받아도 실기 지도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수자에게도 대학 강의 자격을 달라고 건의를 했는데, 이게 받아들여지게 됐습니다. 문화재청에서 이수 자격을 얻은 사람도 교육부에서 받은 석사학위처럼 대학 출강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거죠. 그리고 예전에는 이수자라고 해서 모두 예능보유자 시험을 칠 수가 없었고, 그 중에서도 등급이 있어서 후보자나 교육조교와 같은 극히 제한된 사람만 시험을 칠 자격을 줬는데, 지금은 모든 이수자가 시험을 칠 수 있게 될 겁니다.”

-선생님 아래에 이수자는 8명인데, 전수생은 몇 명이나 됩니까?

“그게 몇 명 안 돼요. 그게 문제죠.”

-왜 그런가요?

“이거 해갖고 밥 먹고 살겠냐는 거죠. 그런데 이걸로도 밥 먹고 살거든요. 그걸 사람들이 몰라요.”

-지금 연주단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이수자 단계입니까, 전수생입니까?

“노래하는 사람들은 이수자도 있고 전수생도 있어요. 그러나 가곡을 반주하는 기악은 그것과 전혀 관계없죠.”

-아, 선생님 문하에선 어쨌든 ‘가곡’ 분야의 전수생과 이수자만 배출하는 거로군요.

“그렇죠. 피리 대금 해금 그런 분야는 또 그 나름대로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반주자도 가곡을 이수를 받게 해야 해요. 승전무도 반주를 지정하고, 판소리도 북치는 사람을 지정하는데, 가곡은 왜 반주자를 지정할 수 없느냐, 일곱 명 한 팀으로 하여 단체종목으로 지정해줘야 해요. 지금 이걸로 투쟁하고 있어요.”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박일호 기자  

-지난 <피플파워> 10월호에 호호국수 송미영 씨 인터뷰가 나갔는데요. 23년 만에 만난 옛 제자로 다시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있잖아요. 송미영 씨는 문하생입니까, 아니면 전수생입니까?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지 마세요. (…생략…) 그런데 진짜 열심히 해요.”

-지난 인터뷰 때 ‘선생님과 다시 만나 가곡을 하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흐뭇한 미소)….”

-선생님 입장에서는 국악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꿈은 거의 다 이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죠. 개인적으로는 인간문화재 이상 더 올라갈 게 없으니까. 그런데 이런 자리를 얻었으니 거기에 대한 의무감이라든가 그런 게 커지는데, 그걸 다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국비로 모든 가·무·악과 이론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국민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건데, 받은 만큼의 10분의 1도 못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이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이루지 못한 게 많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그게 내 욕심이 아니라 가곡 속에는 전체 가·무·악과 국악이론이 다 포함돼 있거든요. 가곡은 모든 국악의 바탕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신이 흠뻑 들어있는 게 가곡이에요. 이것도 몇 시간 동안 강의를 해야 할 이야긴데, 이게 사람을 살리는 정신이에요. 그 에너지가 굉장히 큽니다. 넓게 이롭게 하라, 홍익인간의 정신이 다 들어 있는데, 이것만 알면 사회의 모든 갈등도 해소됩니다. 종북도 없고, NLL 분란도 필요없는….(웃음) 저는 그 에너지를 확신하거든요. 이런 걸 끄집어내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저에겐 그게 역부족이죠.”

-그래도 지금까지 국악인으로 살아오신 삶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해요. 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국악이 참 좋아요.”

막상 인터뷰를 마치고 보니 큰 굴곡이나 역경 없이 원하는 걸 다 이룬 인생으로 보인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재능을 갖고 태어나, 일찍 아버지·어머니를 여의긴 했으나 원하는 대로 공부했고, 부잣집 아들과 결혼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그 분야의 최고 위치에 오른 사람. 게다가 스승과 제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 이 정도면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삶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을까? 지금의 성공이 타고난 재능 덕분이기만 했을까? 열네 살 어린 나이부터 대학 졸업에 이르기까지 뼈를 깎는 노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낮에는 방송국과 국립국악원,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버텨낼 수 있었을까? 또한 철저한 자기관리와 인격 수양 없이 그저 주변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얻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살아오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이 뭐였냐고 물었다. 그는 “그 땐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힘들었던 것도 아니죠”라며 웃었다. 그래도 하나만 이야기해달라고 보채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잖아요. 문화예술계는 이익을 위해 작당하고 세력을 만드는 일이 많거든요? 그런 지역풍토 속에서 세력도 없이 국악을 한다는 게…”라며 말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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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 김주완 기자
  •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이사/출판미디어국장을 맡고 있습니다. 월간 <피플파워> 간행과 각종 출판사업,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 업무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