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에필로그) 내 아버지·아들이 비정규직이라도 모른 체할까

'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기획기사가 지난 11일 해법 모색 전문가 좌담회 기사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이제 경남도민일보 기획취재팀이 올해 6월 초부터 취재하면서 느낀 점을 정리해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한다.

취재 과정에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고 들으면서 든 생각은 "한국사회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 없이 한 치 앞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핵심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가장 많이 제기하는 게 정확한 통계 필요성이었다. 또한 비정규직을 노조 틀로 묶고, 이 힘을 바탕으로 법제화 등 정책적 해결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간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솔직히 노조들로서는 다소 억울할 수 있다. 현대차·기아차·한국지엠 비정규직 문제를 공론화한 금속노조, 공공기관과 학교 비정규직 문제를 의제화한 공공운수노조, 이마트 사태를 사회적 쟁점으로 만든 서비스산업노조, 자치단체 비정규직 문제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각 지역 일반노조 등 민주노총 가맹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도 노조가 이런 비판을 받는 기저에는 보이지 않는 두 가지 덫이 있다.

첫째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조로 엮는 게 너무 어렵다는 현실이다. 비정규직에게 직접 들은 사용자들의 노조 설립 방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현대차와 한국지엠 등 정규직 노조원이 비정규직과 한 조직이 되는데 반대하는 등 노조 스스로 비판 대상이 된 패착도 분명히 있다. 정규직 노조가 그간 적절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 주류 언론들은 사용자는 쏙 뺀 채 '비정규직 양산 = 정규직 탓'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모든 노동자에게 '바닥을 향한 경주'를 강요하고 있다.

두 번째는 비정규직이 이렇게 양산된 데는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라 1998년 파견법 제정 이후 집권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모든 정권에 일정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2006년 비정규직 보호법 제정은 열린우리당이 주도했다. 결과는 비정규직 보호가 아닌 양산이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실을 사실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열린우리당을 계승(?)한 민주당이 이전보다 상당히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수많은 지적에도 비정규직 문제를 양산한 실제 주체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 대중 자신이다. 무한경쟁, 세계화 등 수많은 경쟁 논리에 단련되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우리 스스로 말이다. 일상화한 차별을 모른 척하고, 자신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처절한 몸부림. 한국대중은 이 심각한 차별에 어떤 이견을 제기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형식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 대중이 이 문제 개선을 완강하게 요구했다면 이런 비인간적인 고용 형태가 이토록 빨리 일반화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말한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그 무엇도 아닌 이 문제에 스스로 눈 감아온 대중들의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또한 나락이 두려워 잊어버린 '사회적 연대의식'의 회복이라고.

   
     

우리는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를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 빅토로 위고 지음, 1862년 초판)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을 '또 하나의 계급'이 아닌 '또 하나의 나'로 보려는 자세와 연대의 손길. 그 어떤 정책보다 가장 강력하지 않을까?<끝>

취재 자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한국노동운동연구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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