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인터뷰]동생 차혜란이 쓰는 오빠 차재광 이야기

나 차혜란(43·사회복지사)에게는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 두 살 많은 언니, 세 살 적은 남동생. 이렇게 나에겐 피를 나눈 지원군이 있다. 오늘은 그중에 지원군 대장인 오빠 차재광(46·농협 근무)과 추억을 나누고 현재의 삶도 나눠 보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오빠가 기억하는 내 모습은 어떤 것일까? 가슴 두근거리고 살짝 긴장도 되는 시간이었다. 단감 따느라 힘든 오빠를 쉬지도 못하게 불러 앉혀 인터뷰했다. 피곤함도 잊게 한 우리들의 추억 속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그럼 가볍게 어릴 적 얘기부터 시작해 볼까? 오빠는 시골에서 자랄 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뭐야?

"내가 산으로 들로 숨어다닌 기억이 있는데…. 친구들이랑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남의 산소 앞에 놓인 비석을 밟고 뛰어넘는 놀이를 했던 적이 있어. 그런데 판규라는 친구가 뛰어넘는 순간 비석이 부러진 거야. 그래서 놀란 마음에 도망을 왔는데 산소 주인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판규 아버님이 비석을 수리해 주셔서 다행히 산에서도 내려오고 학교도 잘 다닐 수 있었지. 난 그 일이 제일 기억난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게 있었는데 오빠 학교 다닐 때 별명이 '놀부'였잖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아~ 그 별명….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엄마께서 만들어 주는 누룽지를 밖에 들고 나가 먹으면서 친구들이 좀 달라고 해도 안 주고 혼자서만 먹으니까 그렇게 불렀던 거 같다. 그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한 서른 번은 넘게 그렇게 했던 거 같다. 친구들 약 올려 먹는 게 제일 재미있을 때였으니까."

-그럼 오빠가 기억하는 어릴 때 동생들은?

"혜정이(나의 언니)는 얌전하고 말 잘 듣는 동생이었지. 방학 때마다 엄마가 외가에 우리를 보름씩 보내 놓으면 외할머니께서 혜정이를 칭찬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혜란이 너는 왈가닥이었지만 내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다. 근데 동생 재원이는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그런지 사실 어릴 적 기억이 거의 없다."

질문 하나가 오갈 때마다 옆에 계신 엄마·조카·내 딸들까지 모두 귀를 세우고 듣고 웃는다. 모두가 추억을 꺼내놓기 바쁘다. 엄마도 추억 한 자락 거들고, 언니도 추억 한 자락 거든다.

든든한 지원군 오빠와 함께.

-나랑 관련된 일 중에 오빠 기억 속에 제일 강하게 남아 있는 일은?

"제일 기억에 남는 거야 네가 작두에 손가락을 다친 때지.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게 나는 6학년이고 너는 1학년 때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폐지 모으기, 잔디 씨 모으기 같은 걸 많이 했잖아. 근데 하루는 학교에서 비료 포대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교문 앞에서 네가 안 가져 왔다 하길래 내거를 주고 들어갔지. 선생님이 준비물 안 가져왔다고 내 머리를 깎아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 오빠가 그 얘기 하니까 나도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학교에서 공부가 하기 싫어서 배가 아프다 하고 조퇴했던 적이 있거든. 집으로 오는 길에 산길 넘어오기가 너무 무서워서 산 밑에서 오빠 학교 마칠 때까지 기다렸는데 오빠가 나를 업고 산길을 내려왔던 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오빠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건 그렇고, 오빠 어릴 적 꿈은 뭐였는데?

"내 꿈? 뭐였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 그래, 내 꿈은 파일럿이었다. 방송국 PD도 되고 싶었고, 대학원 가서 공부도 더 하고 싶었지."

-오빠 꿈이 있었는데 농협 맨이 된 건 후회 안 하나? (오빠는 지금 울산에 있는 농협에서 근무 중이다)

"후회 안 한다. 농협 다니면서 창구에 업무 보러 오던 네 올케언니도 만나고, 또 내가 함안 농협에 근무할 때는 아버지께서 참 좋아하셨다. 한 번은 함안 농협에서 칠북 농협으로 업무를 보러 나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

-아버지 얘기가 나왔으니까…. 아버지 안 계시는 현재는 어떻노? (지난 7월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는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뭐…. 아버지 안 계시니까 힘들지…. 주말마다 시골 와서 농사를 도와야 하고…. 너희가 고생 많다. 특히 혜정이가 자기 일도 있는데,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틈만 나면 와서 돕는 것 보면 맘이 그렇다. 모두 개인적인 생활도 거의 못하고 있으니까…."

-아버지 빈자리가 제일 크게 느껴질 때는?

"그야 당연히 농사지을 때지.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아버지께서 집안 대소사를 모두 나한테 의논하시기 시작했는데, 이젠 아버지 없이 내가 그걸 다 결정해야 하거나 집안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질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지. 그렇지만 또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는 않다."

-우리 가족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농사일 좀 줄이고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가끔 온 가족이 모여서 여행도 다니고, 무엇보다 엄마께서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엄마마저 건강이 안 좋아지실까 봐 걱정이 많이 된다. 그리고 우리 애들이나 조카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충실하게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면 좋겠고, 가족 모두 안 아프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특히 김 서방! (작은 방 침대에 누워 있던 우리 신랑 귀가 쫑긋해졌다.) 술 좀 적게 먹고, 담배 좀 끊었으면 좋겠다. 술·담배를 많이 하니까 제일 걱정이 된다. (우와~ 오빠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완전 감동이다)"

-마지막으로 10년 뒤 오빠 모습은 어땠으면 좋겠는지?

"10년 뒤면 내가 56살이네. 그럼 정년퇴직이 가까워졌을 때네. 그때쯤 되면 통나무집 짓는 것을 배워서 도시 인근에 내 손으로 집을 지어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나는 촌에 사는 거는 별로라서 도시 인근에 살 거 같다."

며칠 전 친구가 요즘 한창 유행인 밴드에 '훈훈한 오빠 마음 -오빠가 이 정도는 돼야지'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하나 올렸었다. 어린 남매가 하수구로 끊긴 길을 건너는데 여동생이 한걸음에 건너기 어려워 겁을 먹고 망설이자, 어린 오빠가 엎드려 자기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여동생을 건너게 하는 동영상이었다. 그 동영상을 보고 이런 오빠 하나 갖고 싶다는 친구 말에 '나도 나도' 했더니 친구가 '너는 오빠 있잖아'라고 했는데, 이번 가족 인터뷰를 하면서 그 훈훈한 오빠보다 더 멋진 오빠가 내 곁에 든든한 지원군으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 아픈 동생을 업고 산을 넘어 주는 오빠, 동생이 준비물 못 챙겨 혼날까 봐 자기 것을 내어 주고 머리를 깎였던 오빠…. 나에게 이렇게 훈훈한 오빠가 있어 참 좋다.

이런 오빠 있는 제가 부러우시죠? 여러분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숨겨놓지 말고 자랑해 보세요~ 나도 이런 오빠·언니, 이런 가족이 있다고….

/차혜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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