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21) 투표 참여도 어려운 비정규직

"당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투표하는 제도로는 휴일도 마음대로 쉴 수 없고, 사용자 요구에 발언권이 없는 노동자, 즉 노조도 없고 고용상황이 불안한 이들은 투표일에 일하라면 거절하기 어렵다. 평소 사회적 발언 기회를 얻지 못해 그나마 투표로 자기 의사를 전달해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막혀 버리면 정치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다. 사회적 발언권을 완전히 잃은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거칠게 말하면 '폭동'밖에 없다. 폭동은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다. 우리 사회가 이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극도로 키우고 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도내 한 교수의 말이었다. '비정규직에게 참정권'이라는 요구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지난해 대선 뒤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하는 투표 현실

   

21년째 덤프트럭을 모는 이모(54) 씨는 지난해 대선 때 김해시 장유 한 공사장에서 일했다. 그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산다. 일은 매일 오전 6시 30분에 시작했다. 현장에 도착해 트럭 엔진 예열 시간을 고려하면 오전 4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하루 아홉 차례 정도 운반 일을 마치면 오후 5시 30분. 대충 씻고 나와 장유터널로 향하면 차량은 이미 꽉 찼다. 선거장소인 주민센터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넘었다.

그는 "결국 지난해 투표를 포기했다. 이런 식이면 건설 일을 하는 우리는 투표를 전혀 할 수 없다. 국민으로 누리는 정말 중요한 권리지만 어떡하겠나. 입에 풀칠은 해야 하고, 요즘은 일감 구하기도 어려운데…"라고 씁쓸해했다. 이 씨는 건설 현장 특수고용직·일용직 노동자들이 자기와 처지가 비슷하다고 했다.

정모(29) 씨는 김해 진영읍 한 금속 가공업체에서 2년 넘게 일하고 있다. 종업원 50명 남짓한 중소사업장이다. 이곳 직원들은 정규직과 계약직이 섞여 있다. 이 회사는 대선 일을 유급 휴일로 지정해줬다. 하지만 공단 인근 공장들 대부분이 이날 유급휴일 지정을 하지 않고 기계를 돌렸다고 했다. 정 씨를 제외한 직원 대부분이 투표일 휴일근로를 했다.

정 씨는 "나이 든 회사 선배들이 '투표는 왜 하냐. 바뀌는 것도 없는데, 굳이 할 필요 있냐'며 이날 투표도 하지 않고 휴일근로수당을 받아 챙기더라. 처음에는 이분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선배들 말처럼 우리 같은 이들이 투표한다고 뭐가 바뀔지 투표를 하면서 의문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권자 15% 투표 불가능한 상황

지난해 대선 석 달 전부터 '투표시간 연장' 요구가 그 어떤 공약보다 뜨거웠다. 야당들은 일제히 투표시간 연장을 위해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냈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도 "비정규직과 청년노동자에게도 투표권을"을 모토로 적극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말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선 후보 측은 선거 직전 혼란을 가중시키고, 100억 원에 이르는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며 반대해 무산됐다. 100억 원에 상당수 비정규직의 참정권을 팽개친 셈이다.

그 근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의뢰한 실태조사 결과다. 중앙선관위가 한국정치학회에 의뢰한 2011년 6월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근로자 투표참여 실태조사에 관한 연구'에서 조사 대상 비정규직 노동자의 37.8%가 18대 총선 때 투표하지 않았다. 이들 중 64.1%가 '투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답했다. 또한 그 이유로 '고용계약상 근무시간 중 외출 불가능'이 42.7%, '임금의 일부 혹은 전액 감액'이 26.8%, '고용주나 상사 눈치가 보여서'가 9.8%를 차지했다. 개선점으로는 '제도 개선이나 공직선거법·노동법 등 개정'이 54.2%로 가장 많이 꼽았다.

투표시간을 연장하면 투표 참여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자는 67.7%에 이르렀다. 특기할 점은 투표 참여에 도움될 방안으로 '투표소 어디에서나 투표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 마련'(58.1%)을 가장 많이 선택해 사전 투표 제도 도입(22.9%)이나 투표시간 연장(12.4%)보다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경제민주화 시작, 비정규직 투표권 보장"

지난해 12월 19일 대선 전체 유권자는 4050만 7842명으로 당시 민주노총은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를 바탕으로 투표시간 미보장 유권자가 6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전체 유권자의 14.8%다.

민주노총 대변인실 정호익 실장은 "지난해 집중 캠페인으로 그나마 올해 재·보궐 선거부터 선거일 앞 주 토·일요일에 사전 투표를 시행하는 성과를 거뒀다"면서 "하지만 투표율을 높이려면 현행 노동조건에서는 전국동시선거일 유급휴일 지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캐나다 시민사회단체와 노동계는 이런 참정권 확대 요구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토론토에 있는 사회단체 '워커스 액션센터(Workers' Action Center)' 디나 라드(Deena Ladd) 활동가는 "정규직이든 불안정 노동자이든 투표권은 이슈가 아니다. 선거일 2∼3주 전부터 미리 투표할 수 있고, 당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투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상대 법학과 박상진 교수는 "진주 상평공단 등 노동 현장에서는 기막힌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 현행 투표시간으로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이 투표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박 교수는 "투표율이 낮으면 국가가 투표율을 올리는 게 의무다. 그러려면 저소득층 얘기를 많이 참조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돈으로 환산해 불가를 내세우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경제민주화는 저소득층 의사를 선거에 직접 반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며 투표제도 전면 개선을 촉구했다.

   

취재 자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 / 한국노동운동연구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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