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 선희>는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인 영화감독 지망생 선희(정유미 분)의 나흘 동안 학교 나들이를 담았다. 1년 넘게 '잠수를 탔던' 선희는 유학 추천서를 받기 위해 최 교수(김상중 분)를 찾아가고, 이어 옛 연인 문수(이선균 분)와 선배 감독 재학(정재영 분)을 차례로 만난다. 우연한 만남(문수)도 있고 의도된 만남(최 교수·재학)도 있는데 어쨌든 선희는 이들 세 남자에게 제각각 '특별한 기억'을 선사한다.

"우리 선희는 말이야…." 선희와 자기만의 비밀에 뿌듯해 하는 세 남자. 하지만 그 비밀이란 그저 세 남자가 자기 방식대로 좋은 대로 '우리' 선희를 해석한 결과물일 따름이다. 정작 거기에 '나' 선희는 없다. 선희가 이러쿵저러쿵 명쾌하게 설명하지도 않지만 선희 개인이 부각된 장면 자체가 드물다. 재학과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홀로 묵묵히 걷는 모습이 거의 유일한 선희만의 오롯한 시간이다. 선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적이 궁금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선희는 시쳇말로 세 남자를 갖고 논 걸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잘되는 일도 없어 보이는 선희에게 그런 여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선희의 최대 관심사는 번듯한 추천서를 받아내고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다. 없는 살림에 고급 와인을 선물하고 비싼 음식점에서 직접 술값까지 내가며 거침없이(?), 하지만 다소 뜬금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대상도 최 교수뿐이다. 문수·재학과 만남은 기분이 안 좋거나 최 교수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러니까 뭔가 위로가 필요할 때 이루어진다. 삶과 미래가 불안한 청춘의 생존 본능일까. 어쨌든 선희는 온갖 노력 끝에 '내성적이다' '안목이 있다' 정도의 무미건조한 추천서를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균형감각 등 화려한 극찬으로 채우는 데 성공한다.

영화 <우리 선희>에서 주인공 선희가 최 교수의 두 번째 추천서를 골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루아침에 선희라는 사람이 바뀌었을 리는 없을 테고, 최 교수는 미처 보지 못한 선희의 진가를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속삭인다. 그럼 첫 번째 추천서는 진실이 아니었던 걸까. 반대로 두 번째 추천서는 신뢰할 만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홍상수는 객관적 진실이 있다는 것 자체를 회의하는 쪽인 듯하다.

홍상수가 그때그때 상황의 흐름과 우연·직관에 따라 영화를 찍는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그는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홍상수 추천서'를 어떻게 쓰겠냐는 질문에 "맘에 거슬리는 게 없는 상태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감독의 인위적 개입은 되도록 최소화되고 영화에는 선희가, 물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별 '거슬림 없이' 담긴다. 즉흥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섣부른 재단을 경계하는 홍상수에겐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우린 정리하고 정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의 그런 정의 내리기가 또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 같습니다."(홍상수)

영화 마지막.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세 남자는 그제야 뭔가 어긋나고 뒤엉켜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선희에 대한 새로운 '정의 내리기'가 이어지게 될까. 하지만 선희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날지조차 알 수 없다. 무엇보다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까. 아마도 선희는 늘 그랬듯 골똘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뚜벅뚜벅 길을 걷고 있을 것 같다. 선희만의 그 시간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선희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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