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1) 통영별로 17회 차

오늘은 전라도 땅 여산에서 탄현을 넘어 해남대로와 갈라지는 삼례역까지 이르는 40리 길을 걷습니다. 두 주 사이에 길가 풍경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가을걷이를 시작하던 들판은 그새 제법 마무리 되었고, 아침저녁 날씨는 이제 선선함을 넘어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여산동헌

여산은 지난 6월 17일 치 8회 차 여정에서 살핀 직산과 함께 몇 남지 않은 옛 동헌(東軒)이 있는 곳입니다. 뒷산은 당제산(堂祭山) 또는 당산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당제를 지내던 곳이 분명합니다. 당제와 같은 전통신앙까지 더하니 이곳 여산은 가히 신앙의 자유지대라 할 만합니다.

또한 이곳에는 오래된 산성이 있는데, 성 안에서는 백제~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흩어져 있다는 것으로 보아 성을 쌓은 때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 곳으로 보아 목적은 그 아래로 오가던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일 터이니, 이 또한 옛길을 헤아릴 수 있는 잣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여정에서 이곳 여산 동헌 아랫마당에서 병인박해 때 체포된 천주교도를 백지사(白紙死) 시킨 곳임을 소개하였습니다만, 그곳에는 당시의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犧牲)을 지켜보았을 늙은 느티나무들이 무심하게 잎사귀를 떨구고 있습니다. 현전하는 동헌 건물은 조선 후기에 고쳐 지었다고 전하며, 이곳 여산은 내륙에 있어 읍치에 따로 성곽을 쌓지는 않았습니다. 현대에 들어 우체국으로 고쳐 쓰다가 얼마 전까지는 경로당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원형을 되살렸습니다. 동헌으로 드는 문 밖에는 일찍이 지아비를 잃은 김씨의 열녀비 1기가 서있고, 동헌 안 늙은 감나무 아래에는 선정비 8기와 척화비(斥和碑) 1기를 옮겨 두었습니다.

곳곳을 답사하다 보면 이런 척화비를 간혹 만나게 되지만, 여느 곳과 달리 이곳의 척화비는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게 만듭니다. 바로 동헌 앞마당과 시장, 옥터, 숲정이 등에 남은 병인박해의 흔적 때문입니다. 조선인 신도와 함께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자 그 해에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끈 함대가 병인양요(1868)를 일으킵니다. 이를 계기로 집권자 흥선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굳건히 하면서 척화를 반포하였고, 그 뒤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자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 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빗돌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라고 전면에 새기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 병인작丙寅作 신미립辛未立)"는 작은 글자를 나란히 새겼습니다.

조선 후기 고쳐 지은 여산동헌. /최헌섭

◇여산을 지나다

동헌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옛길을 잡아 서니 지금은 1970년대 초반에 정리된 경작지에 매몰되어 원래의 길은 오래된 지도에서 살필 수 있을 뿐입니다. 대체적인 선형을 머리에 헤아리며 경작지 사이로 난 농로를 걷습니다. 옛길은 아니지만 차도에서 떨어진 한적한 농로를 걸으니 더없이 상쾌합니다. 들이 끝나는 즈음에서 여산천과 옛길이 만나는 곳은 옛 석교동이며 지금도 그즈음에 석교(石橋)마을이 있습니다. 아마 이즈음에 있던 돌다리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석교를 지나며 방향을 남동쪽으로 잡으면 신리에 듭니다. 이곳은 달리 신막(新幕)이라 하는데, 예전에 이곳 신막이방에 있던 새술막(신주막新酒幕)에서 비롯했습니다. 지금은 원수리에 속한 작은 마을이지만, 그 이름에서 이 길을 오가던 나그네의 이용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이곳은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양재역에서 지원받은 역졸들에게 임무를 부여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고개를 넘으면 머잖아 삼례에서 곧바로 해남으로 이르는 길과 전주를 거쳐 통영으로 이르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숯고개를 넘다

지금은 육죽골이라 부르는 육조골에서 원수제를 지나면 옛길은 연명에서 동남쪽으로 799번 도로를 따라 숯고개를 넘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산현 산천에 "탄현(炭峴)은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숯고개 또는 탄현이라 하는 이 고개를 지금 지형도는 1번 국도가 지나는 곳에 쑥고개라 적어 두었습니다. 연명에서 연봉정으로 이르는 원래의 숯고개로 오르는 길가에는 논을 가득 메운 벼가 황금빛으로 익어 있습니다. 그 길을 지나 고갯마루에 섰으니, 이제 여산에서 10리를 걸은 셈입니다. 고개에서 남쪽을 보니 좁고 긴 들녘 가에 연봉정마을이 한 눈에 듭니다. 이곳 또한 예전에는 주막촌이었다 하니, 고개 너머 새술막과 함께 고개를 넘나들던 나그네들이 예서 다리품을 쉬며 막걸리 한 잔에 기력을 돋우었을 것입니다. 옛길은 동쪽 곡벽을 따라 곧장 남쪽으로 열렸는데, 그 자리에 왕궁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옛길은 왕궁저수지 남쪽의 동서에 자리한 금강(金崗)(지금의 금광)과 용남 마을 사이에 형성된 사거리에서 사통팔달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춘향전>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가던 이몽룡이 예서 쉬어갔다고 전합니다.

나그네들이 막걸리 한 잔에 휴식을 취하던 숯고개를 넘다. /최헌섭

◇삼례를 향하여

지금은 저수지 서쪽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내려서니 그즈음에서 익산 보석박물관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익산 땅이지만, 예전에는 고산현(高山縣)의 서쪽 경계 즈음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옛길은 보석박물관과 공원이 차지해 버렸지만 이곳을 지나면, 낮은 구릉을 따라 숲과 밭의 경계를 따라 옛길이 잘 남아 있어 걷기에는 더없이 좋습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를 보면 삼례로 향하는 길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낮은 구릉 위로 구불구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솔숲이 아름다운 송선을 지나 전강리(前江里)에 들면 옛길은 대체로 호남고속도로 동쪽에서 적당히 구불거리며 삼례로 향합니다. 그 아래 신기 마을은 옛 이름이 신정(新亭)이고 그 아래 마을은 역기(驛基)라 적고 역터라 부릅니다. 예전 이곳에 역을 두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근세까지는 그런 적이 없으니, 지금은 이설된 구철선에 딸린 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을 지나면 예나 지금이나 사거리인 통정(桶井)에 들게 되는데, <춘향전>에 통새울로 나오는 곳입니다. 경남에도 같은 이름의 우물이 있는데, 바로 창원에서 안민고개를 넘어 웅천으로 가던 웅천로(熊川路)에 있는 통정입니다. 한자로는 두 곳 모두 통정이라 적고 이곳에서는 통새울이라 한데 비해 경남에서는 통새미라 했습니다. 우물과 샘은 물을 구하는 방식에 따른 이름으로, 우물을 이르는 상형문자 정(井)은 땅을 파 지하수를 구할 때 우물 벽을 나무로 귀틀집과 같이 짠 것을 말합니다. 샘(泉)은 물이 땅에서 솟아나는 곳이나 그 물을 이르니, 웅천로의 통새미는 땅 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음용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정을 지나면서부터 옛길은 정확하게 전주와 익산의 시계를 따라 남쪽의 삼례로 향합니다. 먼저 이 길을 걸은 도도로키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지경을 정할 때 대로를 경계로 삼았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삼례 들머리는 온통 학교가 길손을 맞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서울에서부터 길을 같이 내려 온 삼남대로와 갈라지는 삼례역이 있던 곳입니다. 1892년 10월 1일에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명예회복)을 위해 대규모 삼례집회가 열린 곳입니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했으며, 이듬해 봄에는 경복궁 앞에서 동학 대표 40여 명이 복합 상소를 올리며 오늘날 시민운동의 싹을 키워 갔던 곳입니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