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학기 첫 시간이 되면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하게 한다. 단, 차례로 나와 스스로 소개하지 않고 둘씩 짝을 이뤄 한 사람당 15분씩 30분 간 서로를 인터뷰 시킨다. 처음엔 좀 어색했고 살짝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대부분 출신고나 가족관계, 취미와 주량 등 시시콜콜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 몇 가지 단서를 달았다. 가급적 신상에 관한 것 말고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심층적 질문을 던져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상대의 내면을(inter) 들여다보는(view) 것이 인터뷰임을 잊지 말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그 둘이 함께 나와 상대방을 소개하도록 했다. 내가 들여다본 누군가의 내면이 곧 누군가가 들여다본 나의 그것이 되는 원리를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덕분에 틀에 박힌 요식행위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자기소개 시간이 제법 윤택해졌다.

근데 언젠가부터 그 시간이 조금 난처해졌다. 아니, 어색해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학생들은 아닌데 나만 그랬다. 다수의 소개 속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항목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소개할 때 어떻게 이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출신'을 꼭 밝히더란 사실이다. 그 '출신'이란 게 흔히 말하는 고향이 아니라 '어떤 전형'으로 입학했느냐는 것을 의미해 조금 많이 놀랐다. 그건 마치 '계급' 또는 '계층'과도 같은 구분 혹은 딱지처럼 들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논술 전형이나 농어촌 전형처럼 수시 전형을 통해 진학한 학생들과 정시 입학생들 사이에 이상야릇한 기운이 존재하더라는 거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 스며든 무한 경쟁에 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진은 도내 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 걸려 있는 '서울대 합격 축하' 펼침막. /경남도민일보DB

아니나 다를까, 왠지 불안했던 그 느낌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한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물론 서울대 정시 입학생들이 지역균형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지균충'(지역균형을 줄인 말에 '벌레 충(蟲)'자를 더한 합성어)으로 부르며 무시하고 따돌린다는 그 기사 내용이 모든 학생에게 해당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사회 구석구석 그 어떤 곳도 계급화, 계층화되지 않은 곳이 없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한 경쟁이 얼마나 살벌하고 비인간적인지 익히 보아 온 터, '대학, 너마저'와 같은 불안한 마음을 쉽게 감출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생각해 보라. 서울과 지방은 이미 계급이다. 지방은 끊임없이 서울을 갈구하지만 서울은 지방을 무시하고 독주한 지 오래다. 그렇다고 서울이 하나도 아니다. 다시 강남과 강북이 계급이고, 후자는 전자를 동경하지만 전자는 후자를 업신여긴다. 외고나 과학고와 같은 특목고와 일반고도 계급인 지 오래다. 이들에게 특목고는 경외의 대상이요, 일반고는 멸시의 대상이다. 하긴 중학교도 그렇다. 국제중과 일반중이 있고 그 둘도 이미 계급이다.

유독 대학만 이런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순진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강의실에서 느꼈던 불길함과 '기사'의 내용 모두 콩 심은 데 콩이 나기 시작한 거였으니, 역시 옛말 틀린 게 없다. 콩 심은 데 콩이 난다. 콩만 난다. 문제는 그 콩이 언제 몸에 이상을 일으킬지 모르는 유전자 조작 콩이란 사실이다. 다른 것도 아닌,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함께 출발선에 서게 해 줘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인 교육이 유전자 조작에 앞장서고 있다. 백년지대계가 그러하니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최소 100년은 겪어야 할 재앙이 현재진행형이다. 나라가 이 꼴인데 연애는 무슨 연애냐는 말이 유행이다. 교육이 이 꼴인데 창조는 무슨 창조?

/김갑수(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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