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땅콩과자 파는 김연우 씨

고향은 대구.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살던 곳은 대전. 그가 지금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 앞 길거리에서 땅콩과자를 팔고 있다. 김연우(59) 씨다.

조금 까무잡잡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180cm가량의 키는 선뜻 말 걸기 어려운 외모다. 하지만 말을 걸어보면 편견은 금세 사라진다. 조금은 낯선 충청도 말씨지만 의외의(?) 밝은 표정에서 유쾌함이 느껴진다. 살아온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김 씨는 20여 년 전 대전에서 살 때까지만 해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는 대전에서 '금산 인삼' 판매업을 했다. 하루에 수백만 원씩 벌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금액으로 5000만 원을 선뜻 빌려주고 받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노름을 하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인감도장도 서슴없이 빌려줄 정도였는데…."

김 씨는 연대보증으로 하루아침에 집 한 채만을 남기고 수억 원을 잃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나쁜 생각'을 했다. 뛰어내리려고 15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는데 마침 순찰을 하던 경비원이 발목을 잡았다. 또 한 번은 농약을 마시려는데 낌새를 차렸던 친형이 집으로 찾아와 농약을 마시려는 것을 붙들었다.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하루에 1.5ℓ소주 한 병을 꼬박 비웠다. 그 시간이 3년.

"어느 날은 목에서 피가 나오더라고. 같이 연대보증으로 모든 것을 잃고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는 세상을 뜨고….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김 씨는 부산으로 갔다. 두 달씩 나가는 참조기잡이 배를 탔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마음은 여전히 힘들었지. 결국 배에서 또다시 죽으려고 바다로 뛰어들었어. 구조되긴 했는데, 물을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다 토해내고 해도 몸이 너무 안 좋았지. 밥을 줘도 먹을 수가 없었어.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으니 선장이 '일 안 하는 놈 밥 주지 마라'라며 내팽개쳤어. 그런데 날 불쌍하게 여긴 요리사가 몰래 밥을 챙겨 준거야. 그걸 선장한테 들켜서 요리사가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고 나도 같이 대들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지. 그리곤 배에서 쫓겨났어. 허허허."

김 씨에게 3번의 자살 실패 경험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때 정신을 차렸단다.

"그때부턴 뭐라도 할 수 있겠더라고.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는 '포기는 하지말라'라고 말해주고 싶네."

안 해본 일이 없다. 대형면허를 따서 버스를 운전하기도 했고, 파지를 하루에 1.5t씩 나르기도 했다.

그러다 30년간 땅콩과자를 만든 이종 사촌을 찾아가 땅콩과자 만들기를 배웠다. 사촌은 한 달에 1000만 원씩 벌고 있었다.

"그런데 대전에서는 못하겠더라고. 제2의 고향인데 벌써 쪽도 다 팔리고. 허허."

마산으로 왔다. 벌써 만 3년이 지났다.

세월이 흘러 20여 년 전 연대보증의 아픔을 넘겨준 친구 셋 중 둘은 만났다.

"만나기 전엔 '내가 그것들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까 너무 안쓰럽더라고. 나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겨우 사는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쌀 한 가마니 사다주고 왔다니까. 제 자식들 학교도 다 못 보내고…. 너무 안됐더라고."

지금은 다 지난 일일 뿐이라는 듯 힘들었던 과거를 말하는 데도 표정은 하염없이 밝다. 이유는 '가족' 때문인 듯했다. 부인은 여전히 대전에서 살고 있다. 1남 1녀의 자식이 있는데, 아들은 31살 딸은 30살이 되었단다. 자식들이 잘돼서 좋단다.

"우리 아들은 연세대를 나오고 딸은 한양대를 졸업했어. 나는 해준 것도 없는데 자기들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졸업했어. 아들은 삼성에 취직하고, 딸은 지금 미국에 가 있어. 열심히 했지. 참 기특해."

김 씨는 흐뭇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남매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일요일마다 쉬는데 종종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같이 하려면 아직은 좀 더 고생해야 해."

가족에 대한 마음과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김 씨를 강하게 만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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