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으로 사고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학자'를 뜻하는 '스칼러(scholar)'의 어원도 '여유'라는 의미를 가진 '스콜레(scole)'라고 한다.

그리고 라틴어 '오티움(otium)'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doing nothing)'을 뜻하는 말로 여가의 기원이 되었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말했던 권태도 "사색가와 창의적 정신에게 권태는 행복한 여정과 유쾌한 바람에 선행하는 영혼의 잔잔한 고요"였다.

흔히 동양회화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움이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색을 아끼고 설채를 절제함으로써 화면은 기운으로 생동하는 것이다.

때로 이 비움으로 형태의 결손이 있다 한들 그 의미에는 어떤 결락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또한 동양 미학의 진면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비움은 흘러가고, 어우러지고, 버리고, 잊혀가는 미학이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발 소리가 사라지는 가을도 여가를 위한 비움의 계절이다. 여름을 가로질러 장자의 그릇은 채우지 않아도 넉넉하다는데 채움이나 비움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어 오신다. 비움의 시간이 오긴 오는 모양인가.

창원 도심에 쌓여가는 고풍스런 낙엽 위로 "시몬, 너는 좋으니 낙엽 밟는 소리가" 이 기막힌 운치로 시몬과 구르몽이 함께 걸어온다. 아마도 어릴 때 익힌 구르몽의 시 '낙엽'의 효과일 것이다.

낙엽과 삶을 하나로 돌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인생을 성찰하게 만드는 당혹스러운 날. 이런 적막감 속에서 나무들은 여가를 위해서 비워가고 있는 것이다.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적 행위는 그 무엇이 특정 대상이나 사물일 수도 있고 이미지나 심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으로 말미암음'이다.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과 비워가는 과정을 반복할 때 비로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오티움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80여 년 동안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칸트는 대학에서 강의를 끝내면 집까지 산책을 하면서 그날의 철학적 사고를 정리했다고 하는데 이 산책길의 사색과 여유로움이 칸트 철학을 탄생시킨 셈이다.

'가버린 것을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다산의 세상살이 이치를 꺼내놓고 연서를 뒤적이고 정분에 뒤척인다.

   

가을이 끌어들이는 추억의 소용돌이 속에 그리움을 안고 여유로움과 비워나가는 삶의 기술을 배워보지만, 가을의 풍광 속에서는 여유와 비움을 이야기하는 일이 주제넘고 감정적이고 조심스럽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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