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11)공공부문 비정규직

주인공: 변영희(49)

소속: 전 진주시방문간호사, 현 생명평화결사 간사

사는 곳: 전북 남원시 실상사 인근

간호사 경력: 1987년 이후

지난 11일 승용차로 2시간 30분이 걸려 그녀가 있다는 남원 실상사에 도착했다. 진주시 방문간호사로 일하다 지난해 12월 말 계약 해지(해고)돼 올 2월 말까지 대표를 맡아 거리로, 국회로 뛰어다니던 그가 왜 하필 이곳에? 그와 마주한 오후 7시 30분, 의문은 그가 스스로 풀어주리라.

실상사 한 요사채에서 차를 따르던 그는 제법 긴 침묵을 깨고 "더는 대응하고 싶지 않고, 잊고 싶다"며 입을 뗐다.

◇한겨울 천막 농성, 그리고 계속되는 하혈 = 올 1월 8일이었다. 그는 그날 자궁 내 질환으로 고주파 시술을 받았다. 마취도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방문간호사 노조원(일반노조 경남서부지부)들의 시장실 점거에 동참했다. 2012년 12월 말 진주시로부터 결국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방문간호사 13명은 시장실을 점거하며 무기계약직으로 고용 승계할 것을 촉구했다. 며칠 뒤인 16일 한겨울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은 8일 만에 접었다. 수술 뒤 몸을 제대로 못 추스른 그는 농성 중 몇 차례 하혈했고, 2월 말 국회 방문까지 하혈은 계속됐다.

지난 1월 18일 진주시청 앞에 설치된 '방문간호사 해고 무효, 무기계약직 전환 촉구' 천막농성장에서 진주시 방문간호사 대표이던 변영희 씨가 사태의 쟁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싸웠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진주시가 하고 싶은 대로 끝났다. 방문간호사 13명 중 7명만 바뀐 사업에 재고용되고, 변 씨를 포함한 6명은 결국 재고용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근무환경이 훨씬 열악한 노인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일한다.

방문간호사 문제가 한창 이슈일 때 진주시는 상반기 모자보건사업으로 해직자 6명 중 3명을 뽑을 여지가 있다고 했다. 시는 상반기 이 분야 간호사 모집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강했다. 그러나… = 그는 한 부모 가장이자 두 아이 엄마다. 누구보다 강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번 싸움으로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다고 했다.

1964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에서 고교를 나와 군산의 한 간호대학을 나왔다. 부산 출신 남편과 서울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만나 1993년 결혼해 부산에서 터를 잡았다. 큰아들(고3)과 작은 딸(고1)을 낳았고, 남편과 헤어졌다. 35살까지 병원에서 임상간호사로 일했다. 두 아이 양육 때문에 병원을 그만두고서도 이웃 사람을 돌보며 소소한 벌이를 했다. 인테리어 쪽 사업을 하는 남편에게서 결혼 뒤 생활비를 거의 받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였던 2000년부터 부산 기장군 방문간호사로 2년 일했다. 남편의 음주 후 구타, 의처증이 직접적인 이혼 사유였다. 2001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곧 이혼했다. 그리고 부산을 떠나 진주로 왔다. 2002년 진주시보건소 모자보건사업 기간제 간호사로 1년간 일하고서 2003년 산청으로 귀촌해 4년간 살았다. 그 뒤 다시 진주시보건소에서 방문간호사 등 여러 사업 명목의 기간제 간호사로 지난해 말까지 일했다.

두 아이는 대안학교인 제천 간디학교로 보냈다. 제천은 산청과 달리 비인가교육시설이어서 학비와 기숙사비 전액 부모가 부담해야 한다. 한 아이당 학비·기숙사비만 66만 원으로 매달 132만 원이었다. 현장방문 수업료, 교통비, 용돈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방문간호사 초봉은 월 150만 원(세전)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다. 업무를 마치고 매일 4시간씩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에 한 번씩 노인요양 방문간호 업무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큰아들이 SNS에 엄마 얘기를 올렸는데, 간디학교 친구들이 "앞으로 노동자로 살 우리를 위하여, 지금 노동자로 살고 계신 우리 부모님을 위하여, 어머님 끝까지 싸워주세요. 힘내주세요"라는 댓글을 달았단다. 이 댓글은 그가 대표로 여기까지 왔던 원동력이었다.

◇지노위·중노위 모두 '부당해고' 불인정 = 농성천막을 걷을 때 진주시는 이들을 최대한 뽑도록 노력하겠다는 모호한 구두 약속을 했다. 한국에서 공무원이 모호하게 말하면 "하지 않겠다"는 것과 대부분 동의어다. 진주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주시 방문간호사 사태는 기존 방문간호 사업이 통합건강증진사업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기계약직 예외직종이던 방문간호사도 무기계약직 전환자로 바뀌면서 비롯됐다. 문제는 전환 적용 시점이 2015년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진주시처럼 각 자치단체가 임의대로 기존 인력을 계약 해지할 것 같아 수차례 공문으로 "기간제 근로자를 근거 없이 불필요하게 해고하는 것을 자제해달라"며 사실상 기존 인력 재고용을 촉구했다. 진주시는 당시 "2015년이 적용시점인 만큼 어차피 (보건복지부가) 2년간 유예를 줬기 때문에 무기계약직을 더 우수한 인력으로 뽑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심사도 외부인사까지 참여해 어느 때보다 공정하게 했고 경쟁률도 3대 1이었다"고 주장했다.

공무원에게 기간제 노동자는 더 경쟁해야 할 대상, 덜 우수한 존재였다. 기간제 노동자의 삶과 가치는 '더 우수' 아래 있었다. '나는 그 과장과 생각이 다르다'고 떳떳하게 말할 도내 공무원은 얼마나 될까? 결국 기존 13명 중 7명만 신규 채용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과 사무관이 "진주시에 페널티를 줄 권한이 없다"며 한탄했을 정도였으니 진주시 주장이 얼마나 억지에 가까웠는지 가늠해볼 만하다.

그 뒤 경남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는 이들을 '부당해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노조에 가입하자고 나섰던 친구가 대열을 이탈해 채용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너무 다쳤다. 몸도 마음도 너무 안 좋아 4월 실상사로 왔는데, 지난 7월 중순 이곳으로 완전히 옮겼다. 지금은 생명평화결사 간사 일을 보고 있다"며 "진주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처럼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이제는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그. 진주시에는 그와 같은 기간제 노동자가 703명(9월 30일 현재 지방공무원 1475명, 무기계약직 289명)이나 있다. 그의 오늘은 왠지 그들의 미래 같아 씁쓸하다.

취재 자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한국노동운동연구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