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간 말과 글을 사용해 왔지만 여전히 말은 어렵고 글은 더 어렵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얘길 듣고 읽었음에도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니 그렇다. 최근 정부·여당이 국면전환용 카드로 애용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좋은 예다. 읽는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극과 극을 오간다. 누군가는 역적이 되기도 하고 충신이 되기도 하니 역시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게 사람의 말과 글이다.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건 언어가 가진 맹점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외연(外延)과 내포(內包)가 늘 한 몸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즉 '말(혹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경우도 있지만 때론 그 속에 담긴 맥락도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잘 먹고 잘 살아라"고 할 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덕담이지만 맥락으로 보면 저주나 증오일 경우가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때로 언어는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세상 만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걸 감안하면 대단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어떤 단어나 표현이 갖고 있는 특유의 어감, 소위 '뉘앙스'란 것 때문이다. 진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려 할 때 긍정적 어감과 부정적 어감의 단어를 나눠 취사선택한다. 그런 다음 그 단어를 중심으로 이른바 '프레임'을 짜는 거다.

'자유'와 '규제'란 단어가 있다. 누구에게나 전자는 긍정의 언어요, 후자는 부정의 언어다. 자유를 마다하며 규제가 좋다고 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정글보다 더 냉혹한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규제받지 않은 대자본, 특히 금융자본의 무한 자유는 세상을 지옥의 입구로 몇 차례나 내몰았다. 그럼에도 기업에 대한 규제를 물어보면 반대 의견이 여전히 높다. 어감의 영향이 크다.

2005년 사학법 개정안 좌초도 그랬다. 보수 세력의 결집과 저항이 큰 이유였지만 여론을 얻지 못한 것도 컸다. 그 핵심에 '자율'이란 단어가 있었다. 엄청난 세금이 투입되는 데다 교육기관이니만큼 사립학교는 공공의 영역이며, 당연히 개방형 이사제도를 도입하고 감사를 내실화하자는 내용이었다. 근데 여론에서 밀렸다. 개혁 대상들은 '규제하려 하지 말고 대학의 자율에 맡겨 달라'고 했고, 다수가 그 말이 훨씬 설득력이 크다 여긴 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APEC 최고경영자회의에서 '창조경제'를 강조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영화'(privatization)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의도가 제대로 먹힌 케이스다. '관'(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교묘하게 활용해 긍정적 어감을 제대로 살린 번역으로 주도 세력에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안겨 줬다. 하지만 이는 '사유화'라고 번역해야 옳다. 'private'에서 나온 단어인 데다 국가 소유의 무언가를 개인(들) 소유로 전환한다는 것이니 그렇다. 만약 그렇게 해석했다면 지금껏 진행된 각종 민영화가 대부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창조경제'란 말이 득세하고 있다.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성장 원천은 혁신뿐이며, 창조경제가 바로 혁신 패러다임"이란 연설을 했다고 한다. 긍정적 어감의 단어는 다 모은 느낌이다. 문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며, 분명한 건 그 혁신의 선두에 김기춘과 홍사덕 그리고 서청원이 서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원자력 발전을 그린 에너지로 묘사했던 전임자의 언어 구사를 연상시킨다.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상태, 그걸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김갑수(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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