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8) 통영 성동조선해양

그: 이사람(가명·39)

소속: 통영 성동조선해양 사내 하청업체 계약직

사는 곳: 창원시 마산회원구

경력: 5년차 A급 용접공

7월 말 종방한 KBS <개그콘서트> '나쁜 사람'이라는 코너에 나오는 '이상구'는 너무 안 된 이다. 늘 실패한 삶과 그 과정을 얘기하면서 경찰관 눈물을 짜낸다. 이사람 씨는 그 삶이 '나쁜 사람'의 이상구와 정말 닮았다.

그는 1974년 고성 동해면에서 태어나 이농을 한 부모님을 따라 6살 때 마산으로 왔다. 1993년 마산 한 공업계 고교를 졸업해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해 삼성항공(현 KAI-삼성테크윈으로 나뉨)에 입사했다. 고교 때는 학년장까지 했었다. 기술직이었지만 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일했다.

94년 군대에 가서 제대 직전 수능 공부를 시작해 제대하자마자 시험을 쳐 창원전문대(현 창원문성대) 행정과에 합격했다. 1997년부터는 회사 일과 야간대학 공부를 병행했다. 이 시절 아내를 만났다.

이 씨는 "회사 일, 야간대학 공부에 연애까지 하랴 정말 바쁜 나날이었지만 내 인생의 최고 황금기였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99년 10월의 마지막 날 그는 그 황금기 중의 최고봉이던 결혼식을 올렸다.

실업계 고교를 나온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던 '삼성맨'. 남부럽지 않던 그에게도 IMF구제금융 여파가 결국 들이닥쳤다. 회사는 그가 일하던 공장자동화(Factory Automation) 사업부를 분사하고 인원을 감축한다고 했다. 분산 반대 투쟁도 했지만 결국 99년 12월 말 사표를 썼다.

회사 선배와 당시 한창 유행하던 PC방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기로 하고 처제 남편이 창업투자사 사장이어서 그로부터 5억 원 투자를 받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이 5000만 원을 모아 법인을 세우고 직원 5명을 둔 서울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일이 안 되려니까 처제와 그의 남편이 하필 그때 이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5억 원 투자는 물거품이 됐다. 사무실 문 연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자본금을 다 까먹고 사업을 접었다. 아내는 이미 첫 애를 출산했다.

그에게도 퇴직 직후 다른 기회가 있었다. 그는 삼성항공에서 분사한 업체 SFA로 입사 권유를 받았다. '삼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지 않았고, 퇴직 때 이 회사 주식 600주를 받았다. 이 업체는 2011년 기준 연매출 7532억 원에 이르는 튼실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가 받은 주식을 그대로 뒀더라도 현재 시세로 4억∼5억 원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주식을 받자마자 그는 '푼돈'만 받고 다른 이에게 팔았었다.

진수 뒤 인도 직전 마무리 작업 중인 상선(오른쪽)이 안벽에 자리하고 있다. 왼쪽은 육상 독으로 탑재 등 배 건조 작업이 주로 이뤄지는 곳이다.

그해 4월 말 르노삼성차 공장이 있는 부산 강서구 명지에서 600만 원을 들여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그때 번 돈을 모아 마산회원구 한일 2차 아파트 맞은 편 빌딩에 세를 얻어 번듯한 장어·조개구이 가게를 차렸다.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아 건물주가 신축을 한다며 비우라고 했다. 보증금의 몇 배였던 권리금 한 푼 못 받고 나와야 했다. 인생 두 번째 쓰디쓴 잔이었다.

2003년 9월 이전 직장 선배 소개로 경기도 군포의 휴대전화 도광판 생산업체 총괄관리직으로 갔다. 2년 정도 하다가 회사가 다른 사장에게 넘어갔다. 전 사장 직속 총괄부장인 탓에 눈치가 보여 나와야 했다. 퇴사 뒤 창원의 한 휴대전화 모듈 생산 업체 관리팀장으로 일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숙성횟집을 한다며 도와달라고 해 직장을 그만뒀다. 활어를 좋아하는 지역 소비자에게 숙성회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재고 처분도 어려워 1년 만에 그만뒀다.

다시 볼보 굴착기 붐대를 제작하는 업체 영업관리 파트장으로 들어갔지만 2007년 말 미국발 금융위기는 다시 그가 직장을 잃도록 했다. 두 번의 금융위기는 그에게 직격탄이었다.

"이제는 기술이나 다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경남직업훈련원을 들어가서 6개월간 특수용접을 배웠다. 용접산업기사 자격증을 따서 통영 안정공단 SPP조선에 취업했다.

2개월간 이곳에서 일하다가 "실력이 형편없다"며 쫓겨나기도 했다. 그 뒤 성동조선 사내 하청업체 시급직(계약직)으로 들어갔다. 통영·고성 조선소는 원청업체 정규직은 직영, 하청업체 장·단기 계약직은 '본공'이라고 불렀다. 대우조선해양과 달리 이곳에는 사내 하청업체 소속 상용직(정규직)은 거의 없었다.

1년 정도 '본공'으로 일하다가 여기에서 만난 하청업체 직장이 물량팀을 꾸려서 그와 함께 다녔다. 용접 실력이 부쩍 늘어 초단기간에 A∼B급 대우를 받았다.

진수 뒤 마무리 공정 중인 또 다른 상선 윗부분에서 작업 중인 노동자들. /이시우 기자

그는 성동조선이나 SPP조선 등 직영 직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이 씨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는 이도 없다. 함께 일하는 것도 아니고 마주칠 일도 없다. 통영 안정공단·고성 동해면 조선산업단지에 (정규직) 노조가 있는 곳도 없다. 아예 교류가 없어 우리와 전혀 다른 노동자일 뿐"이라고 했다. (이 씨 얘기와 달리 성동조선 직영노동자 900여 명은 올해 7월 말 금속노조 성동조선지회를 설립했다. 그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세계 조선산업 1위라는 국가에서 이런 식으로 하청에 재하청에, 재재하청 형태로 일을 하면 얼마나 경쟁력이 있겠는가. 한 자리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다. 생산성 향상이나 기술축적? 다들 이런 식인데,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이게 이뤄질지 솔직히 의문이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거제·통영·고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아우르는 공제조합이라도 만들어 이곳 비정규직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원청업체에 한 번 찍히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조선소에서도 일하기 어려운 게 이곳 현실이다. 그래서 노조 설립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나도 물량팀장에게 한 차례 돈을 떼인 적이 있는데, 잦은 체불임금이라도 없애고, 너무 부당한 대우는 시정 건의라도 할 수 있는 단체가 있으면 좋겠다."

취재 자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한국노동운동연구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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