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50) 통영별로 16일 차

<대동지지>에 나와 있는 노정으로는 삼남대로와 갈라지는 삼례역(參禮驛)까지 불과 70리 길이 남았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지나는 여정의 풍경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까닭이겠지만, 추분이 지나면서 하루하루 짧아지는 해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합니다. 늦은 오후에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일모도원(日暮途遠)에 처한 나그네 마음을 실감하게 되겠지요. 이제부터 좀 걸을 만하다 싶은데 계절은 우리한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옛 은진 고을을 지나다

지난 여정을 마감한 관촉들에 서니 황금 들녘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벌써 가을걷이를 마친 논도 더러 보이고, 고구마를 캐는 곳도 있습니다. 관촉들에서 교촌으로 이르는 고갯마루에는 팽나무 한 그루가 300년 이상 자리를 지키며 서 있고, 그 곁으로는 작은 돌들이 모아져 있어 어릴 적 어느 마을에서나 보아 왔던 풍경을 예서 다시 보게 됩니다.

봉곡서원 앞으로 옮겨 둔 황화정 빗돌.

이곳 은진에서 향화정을 향해 가는 20리 길은 은진향교와 옛 은진관아 자리를 지나갑니다. 고개를 내려서서 은진향교 간판을 따라 100미터 정도를 들어가면 향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은진향교는 고려 우왕 6년(1380)에 처음 세운 뒤, 조선 광해 7년(1615)에 지금 자리로 옮겨온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습니다. 향교 앞 밤나무 밑에서 알밤 몇 알을 챙겨 은진 관아가 있던 면사무소를 향합니다.

당시 은진현 객사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450살 된 느티나무가 옛 기억을 회상하듯 서 있습니다. 곁에는 2005년에 은진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 18기를 모아 비석거리를 조성해 두었습니다.

호젓한 시골 면소재지를 지나면 길손들 발길을 붙들었을 술막이 있던 쟁인촌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방축천을 건넙니다. 그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 제방을 쌓아 수리를 안정시킨 곳인데, 1916년에 간행된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습지로 되어 있습니다. 습지는 서쪽으로 포구가 있던 강경까지 이어져 토지 이용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충청·전라의 지경처 까치말

습지를 통과하여 곰밭(웅전 熊田)으로 이르는 곳에는 얕은 재가 있어 지금도 새티(초현 草峴)라 불립니다. 개태골을 지나면서 맞는 짝퉁 한옥마을의 담장 밖으로 가지를 드리운 감나무에서는 붉게 익어가는 감이 가을 정취를 더해 줍니다. 예서 얕은 재를 넘은 삼거리마을은 지금도 사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입니다. 그 동쪽 마을이 까치말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산천에 "까치말(작지 鵲旨)은 군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충청도 은진현의 경계다. 해마다 7월 15일에 가까운 양도(충청·전라) 백성들이 모여 씨름(수박·手搏)으로 승부를 다툰다"고 나옵니다.

충남 논산 연무에서 충청 땅을 벗어나며. /최헌섭

◇진훤이라 불러다오

예서 남쪽에 있는 연무읍은 강군 양성의 요람입니다. 독자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청춘의 한때를 이곳에서 보내며 땀 흘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후백제왕 진훤의 무덤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절)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견훤(甄萱)이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고래로 진훤이라 불러왔다고 합니다. <동사강목>에도 임자년 진성여주 6년(892)에 "남해 수졸(戍卒) 진(甄:소리는 진:眞)훤(萱)이 배반하여 무주(武州·지금 광주 일원)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개국공(漢南君開國公)이라 했다"고 전하며, 그의 성을 진으로 읽어야 한다고 병기해 두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도학 선생이 <진훤이라 불러다오>라는 저술을 통해 그런 주장 펼치고 있기도 하ㄱ요. 서쪽으로 진훤의 무덤을 어림하며 걸으면, 곧 옛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었던 황화정 옛터에 듭니다.

◇황화정(皇華亭)

황화정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황화정리 원황마을에 있던 정자로 조선시대에 전라도의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교귀(交龜=감사나 병·수사가 바뀔 때 인신(印信)이나 병부(兵符)를 넘겨주고 받는 일)를 하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산군에 "황화정은 군의 북쪽 11리에 있는데, 신구 관찰사들이 교대하는 장소이다"고 나오며, <대동여지도> 16-4에는 여산 북쪽에 황화대(皇華坮)라 적어 두었습니다.

관련 자료를 뒤지다보니 이름에 대한 여러 설이 전해지는데, 가까운 은진에 있던 황화산 황화대(皇華臺)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의 책 은진현에는 "황화산은 시진(市津·은진현의 옛 이름)에 있는데, 지금 현의 치소와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산에 큰 돌이 편편하고 널찍하여 시진의 물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를 황화대라 부르며, 전하는 말에 백제 의자왕이 잔치하고 놀았다 한다"고 한 데서 그리 볼 수 있겠다는 겁니다. 옛 황화산을 지금도 그리 부르거나 달리 봉화산이라고 하는데 황화정 옛터에서 북북서쪽으로 8㎞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통영일(별)로를 지나는 노정에서는 황화정 위치조차 제대로 살피기 어렵지만, 남쪽 고내리 봉곡서원 앞에는 현종 11년(1670)에 여산군수 정채화가 황화정을 중건하고 세운 빗돌이 있어 당시 사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도 지금 황화정마을에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지나오는 길에 황화정 빗돌을 살피고 남쪽으로 길을 서둡니다.

◇양재역

황화정 남쪽으로 머잖은 곳에 양재역이 있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역원에 "양재역(良才驛)은 군의 북쪽 6리에 있다"고 했고, <대동여지도> 16-4에는 황화정과 여산 중간에 표시하였습니다. 위치와 지명으로 헤아리면 충청 땅 고내리 구량마을 즈음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드디어 전라도 익산시 여산면에 듭니다. 예전에는 충청·전라 양도의 지경처가 지금보다 북쪽인 황화정 또는 까치말에 두어졌다가 현재는 이즈음이 경계가 되었음을 지나오는 여정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곳은 동쪽으로 전북 완주군 화산면으로 이르는 길이 결절되는 곳이어서 역의 동쪽 고내리 보성마을에는 보성원(保城院)이 있었습니다. 그 동북쪽 옹점(甕店)은 이름으로 보아 독 짓던 곳 같습니다. 그 독은 보성원·양재역을 잇는 길을 통해 유통되었겠지요.

   

◇전라도 땅 여산(礪山)에 들다

양재역을 지난 옛길의 동쪽으로는 통영별로와 비슷한 선형을 유지하며, 국도 1호선이 남북으로 열려 있습니다. 역을 나서서 금곡·신양마을로 이르는 길가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있고, 가로변의 억새며 갈대, 강아지풀도 씨앗을 뿌릴 준비를 마쳐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호사를 누리며 얕은 재를 넘으니 여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마침 갈림길에 자리한 고등학교에서는 여산면민의 가을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고, 길 양쪽을 가득 매운 차량 사이를 지나니 전북에서 연 순례길을 만납니다. 2009년에 열린 순례길은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각 종교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배려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곳 통영별로에서 만난 순례길은 전체 9코스 중 3코스인데, 지나는 길에 숲정이성지와 여산 동헌 앞 백지사 순교지를 둘러봅니다. 두 곳 모두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돼 1868년에 희생된 23명의 천주교 순교자를 기리는 곳입니다. 모두 4곳의 사형장이 있었는데, 숲정이와 시장에서는 참형, 옥터 교수대에서는 교형, 동헌 앞 백지사 터에서는 백지사를 집행했다고 합니다.

백지사(白紙死)란 이름 그대로 얼굴에 백지를 덮고 위에 물을 부어 질식하게 한 형벌이었습니다. 글을 끔찍한 형벌로 마감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종교를 떠나 150년 전 그들이 죽음에 맞서서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그 용기를 생각하며, 지금 우리에게도 그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성찰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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