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한 차례 내리고 거짓말처럼 처서가 되었다. 올여름은 폭염이 기승을 부렸고 중부지방과 달리 남부지방에는 비도 귀했다.

개학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떨어지고 에너지 절약으로 관공서도, 대형마트도 시원하지 않았다. 마음 놓고 에어컨을 돌리지 못하기는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처서가 지나고 기온이 내려가자 불쾌지수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생활에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달력의 날짜가 9월로 바뀌자 간절기 옷을 하나, 둘 꺼내 입고, 침대 패드와 이불도 계절에 맞게 바꾸었다. 출근하면서 라디오를 들으면 완연한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해주는 선곡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렇게 가을이 왔다는 것을 달력과 옷차림, 라디오 방송의 인사 멘트에서 재차 확인하면서 9월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에 들어섰다. 지금껏 막연하게 보내고 있던 계절이 온몸의 감각으로 느껴졌다.

아! 가을이다. 꽃을 보면서 이 계절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길을 걸어가면서 가을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생활에 쫓겨서 3월이 되고 기온이 올라가면 봄이 온 것을 알고, 7월에 접어들면 여름이 온 것을 알고, 9월이 되면 가을이 된다는 식의 계절감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계절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아쉬워하며 또는 그 계절을 만끽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곤 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껏 다녀온 여행지들은 모두 그 계절에 인기가 많아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음식점도 '맛집'을 찾아다니다 보니 역시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줄을 서거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정신없이 먹기에 바빴다. 그래서 여행에 대한 소감은 '늘 분주하고 피곤하고 아쉬움이 남는다'였다.

얼마 전에도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과 경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개인 풀이 딸려 있는 멋진 펜션에 예약을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블로그를 뒤져 맛집을 찾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준비를 한 끝에 우리는 여행을 떠났고 뜻하지 않게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일정에는 차질이 생겼고 결국 펜션에서 온종일 머물렀다. 가을 나들이에 대한 감흥 따위는 없었다. 비를 원망했고, 풀장의 물이 지나치게 차갑다는 불평뿐이었다. 맛집에서 밥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의 피로감과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북적거리는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가 화장실을 다녀와야만 했다. 그런데 코스모스 길에서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에 전송받고 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햇살이 내려앉는 교정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계절을 쫓아가기 바빴던 날들 대신, 계절의 쉼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시월의 시작이다. 분주하던 일상을 내려놓고 쉼표를 발자국처럼 찍어가는 시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심옥주(김해분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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