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4)한국지엠 부평공장 30대 비정규직

등장인물: 그(이파란·가명·32)

때: 1998∼2013년 현재

직업: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2003년 4월 인천 한 소규모 전자업체에서 산업체 병역 특례 병으로 일하던 파란 씨는 연장근무까지 하며 지친 몸으로 오후 9시가 조금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연 순간 그의 얼굴은 잿빛이 됐다. 살림살이 상당수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빚에 쫓겼던 부모님이 이른바 '야반도주'한 것이었다. 그에게 종이 한 장도, 사전 귀띔도 없었다. 지금은 충북의 한 농촌지역에서 사신다.

당시를 돌이켜보던 그는 "'그래도 외동아들인데, 오죽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정말 막막했다"고 했다. 그의 나이 23살 때 일이었다.

만 32살. 많지 않은 나이지만 그의 20∼30대 초반은 시련이 일상이었다.

인천 토박이인 그는 봉제공장을 하시는 부모님의 독자로 태어나 넉넉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고교 2학년 때인 1998년 채권자들이 가구며, TV 등에 압류 딱지를 붙이는 것을 봤다. 부모님 경제상황이 심상찮은 것을 처음 짐작했다. 수능을 치고 수원의 한 대학에 합격해 아버지께 연락했다. 아버지는 "등록금 대출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는 곧바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내가 대학을 갈 형편이 도저히 되지 않는구나'라는 스스로의 판단 때문이었다.

졸업 뒤 곧바로 인천 한 밥솥 공장에 취직했다. 1년 정도 일하고 산업체 병역 특례 병을 하고자 전자 관련 자격증을 따려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훈련원이 끝날 무렵 한 전자업체에서 곧바로 병역특례를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입사했다. 그 과정에 부모님은 그의 곁을 떠났다. 원래 살던 집에서 나와 혼자 자취를 하며 겨우 마음을 다잡고 공장에 다녔는데, 입사 2년 만에 이 업체가 부도를 맞았다. 다시 멍했지만 부랴부랴 다른 업체로 옮겨 남은 병역 특례 기간을 마무리했다.

인천 공단 내 영세사업장을 떠돌던 그는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엠대우(현 한국지엠) 부평공장 사내 협력업체 계약직 직원으로 들어갔다. 입사일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30대 초반 비정규직 노동자가 차체 공정 작업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2006년 6월 6일, 하필 한반도 최대 비극을 기리는 날이었다. 입사 초기 차체 조립라인에서 차체가 지나갈 때 미흡한 이음 부분 용접 작업을 했다. 늘 영세사업장을 떠돌던 그에게 이곳은 뿌듯함이었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내가 만든 자동차를 거리에서 발견하면 가슴이 뭉클했다. '저걸 만드는데, 내 손도 거쳤다'는 자부심이랄까. 내가 만든 생산품을 두고 이런 감정에는 정규직, 비정규직이 따로 없다."

2007년 9월 초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했다. 사내 협력업체 노동자로서 늘 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던 그도 노조에 가입했다. 결성 초기 조합원은 100명가량이었다. 하지만 결성 보름도 되지 않아 노조 설립을 알리는 구내 식당 점심 선전전에서 구타 사건이 발생하고, 대졸자인 6명은 학력 허위기재로 해고됐다. 그해 10월 비정규직 노조원이 가장 많은 사내 협력업체가 원청사인 지엠대우와 재계약에 실패해 노조원 30명은 자동 계약 해지됐다.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원청업체가 본보기로 보여줬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후에도 노조 탈퇴를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이른바 공장 내 '특별관리대상자'가 됐다. 다른 부서에서 성격이 안 좋은 이를 일부러 그의 옆에 배치해 그가 일을 그만두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 사람이 뒤늦게 그와 소주를 마시면서 들려준 얘기였다.

미국 금융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2008년 금융위기, 그 여파로 지엠 본사도 사실상 부도 상황을 맞았다. 이 미국발 금융위기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해고로 돌아왔다. 지엠 본사가 위기에 빠지자 2008년 말 부평에도 위기가 닥쳤다. 당시 회사와 정규직 노조(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는 정규직 우선 전환 배치에 합의했다. 전환 배치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2008년말부터 한 달가량 유급 휴직, 일주일에 2∼3일 일하는 부분 휴직을 하다 2009년 4월 초에는 전면 무급휴직이 시작됐다. 사내 하청 노동자에게 희망퇴직을 받았다. 2009년 10월 한국지엠은 상당수 사내 하청업체와 재계약하지 않아 폐업이 속출했다. 그도 결국 그때 공장에서 나왔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렇게 부평공장 비정규직 대량 실직으로 이어졌다. 업체 폐업 뒤 그도 다른 비정규직 노조원과 함께 처음으로 비정규직 투쟁을 했다. 아침 선전전부터 천막농성, 각종 지역 집회 참석, 용산사태 현장에도 갔었다. 두 조합원은 2010년 12월 한겨울 선전탑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2011년 2월 초 회사와 해고자 단계적 복직에 합의했다. 이 합의로 마지막까지 남아 싸웠던 15명 중 한 명이던 그가 올해 3월 초 다시 부평공장으로 복직했다. 물론 사내 협력업체 직원, 비정규직으로.

그는 말했다.

"복직 전 내가 하던 일은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았다. 그런데 사내 하청노동자 임금은 반 토막이다. 그렇게 깎인 임금이 정규직에게 가나? 아니다. 인력 파견업체(사내 하청업체를 말함)와 원청업체 수익이 된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늘 시달리며 흘리는 우리 사내 하청노동자의 피·땀, 눈물은 결국 정규직이 아닌 그들에게 간다. 이게 열 받는다. 누군가에 의해 구분되고 분리되면서 사람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삶. 이게 우리의 근본적인 서러움이다."

   

취재 자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한국노동운동연구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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