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의 향기]이양수 3·15 부상자 동지회 회장

지난 21일, 이양수(사진) '3·15 부상자 동지회' 회장이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이로써 3·15 의거 당시 첫 시위를 주도했던 주요 민주당 당원들은 모두 세상을 등진 셈이 됐다.

고 이양수 회장은 1960년, 서른 살이었다. 마산상고와 국민대학교를 졸업한 후 1956년 대통령 선거 때 신익희 후보 경남도당 유세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9년 민주당 창원을 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후 1960년 3월 15일을 맞이했다.

이양수 회장은 1960년 3월 15일 밤 9시 불종거리 앞에서 군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부정만을 저지른 이 더러운 자유당 정권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인간답게 살 수가 없습니다."

시위대는 남성동 파출소 앞으로 향했고, 무장한 경찰들은 집총자세로 시위대를 기다렸다. 순간 총알이 빗발쳤다. 이 회장은 이때 경남도경에서 파견 나온 무술 경관들에게 체포됐다.

이양수 3·15 부상자 동지회 회장.

남성동 파출소에 끌려간 이 회장은 허벅지 골절상을 입었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군홧발 질에 대퇴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등허리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엄습해 오는 오한을 못 이겨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3·15 의거 증언록,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중)

이후 이 회장은 목발을 짚고 4월 11일 도립마산병원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지키는 등 투쟁의 선두에 서 있었다.

의거 후 이 회장은 5·16 쿠데타 세력이 추진한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1963년의 일이었다. 1976년에는 국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으면서 국가유공자가 됐다.

이 회장은 1970년대 마산수협 상무로 활동했으며, 1978년 '피조개 조합설립 수석이사'라는 직함을 달았다. 1982년 3·15 부상자 동지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1993년 3·15 의거기념사업회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2011년부터 4·19 민주혁명회 경남지부장으로 활동해 왔다.

이 회장이 4·19 민주혁명회 경남지부장직을 맡아 왔던 2013년에는 국립 3·15 민주묘지 청소 용역 노동자를 해고한 일이 있었는데, 노동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고 이양수 회장 영결식은 25일 오전 10시 30분 국립 3·15 민주묘지 참배단에서 거행된다. 이 회장은 영결식 후 국립 3·15 민주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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