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계급 비정규직] (2)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2010년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25일간 클릭·베르나·엑센트를 생산하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공장이 멈춰 섰다. 2005년 5공장 점거 농성에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의 두 번째 공장 점거 농성이 있었다. 그들은 "출입증을 반납하고, 사원증을 쟁취하자"고 외쳤다.

◇사원증 아닌 출입증으로 출·퇴근하는 노동자 = 이도한(38) 씨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는 규모 있는 정규직 노동자로 산 적이 없었다. 가내 수공업체보다 조금 큰 영세 장판 생산업체에서 1년 반가량 일했을 때를 정규직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생애 단 한 번 정규직으로 일했다.

2002년 5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 하청업체 계약직 직원으로 입사한 그는 공장 정문을 지날 때 사원증이 아닌 출입증을 제시한다. 사원증은 관리직과 정규직 직원에게만 지급된다.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에게는 사원증과 방문증의 중간에 해당하는 출입증이 주어진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데도 사원증과 출입증은 엄연한 신분 차이를 나타낸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홍역을 치렀다. 바로 암이었다. 1995년 여름 군대를 가고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그 병원에서 더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옮긴 병원에서 뇌 CT 촬영을 하고서 부모님만 들어오라고 했다. 자주 머리가 아팠는데,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의사는 그의 부모에게 뇌종양에 따른 뇌 수두증이라고 했다.

9월 초 수술 뒤 3개월가량 쉬고서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상 그해 12월 울산의 한 섬유공장에 들어갔다. 태광실업이라고 꽤 규모 있는 업체였다. 그러나 계약직으로, 그의 비정규직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입사 초기에는 하루 50알이 넘는 약을 먹으면서 일했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화학공장은 기계를 한 번 가동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토·일요일 구분없이 주야 3교대로 근무했다. 심지어 추석이나 설에도 공장을 가동해 2년에 한 번밖에 못 쉬었다. 3조 3교대는 주야 2교대보다 더 힘든데 이것저것 떼면 겨우 월 80만 원을 받았고, 보너스도 400%가 전부였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하는 업체에 현대차 노조 대의원 출신이던 한 형이 일하러 왔다. 그 형도 "뭔가 잘못됐다"고 했다. 그래서 지역 노동운동단체, 한국노총·민주노총, 노동위원회, 노동부 울산지청 등 기관과 노동단체를 찾아다녔다. 그는 그때야 근로기준법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야간근무수당, 휴일근로수당 등이 있다는 사실을 그 공장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알리고자 유인물을 돌렸다. 그 결과는 해고였다. 1999년 해고되고서 경기도 양주에 있는 한 소규모 장판 업체에서 일했다. 박봉은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98년 섬유공장에서 만난 현대차 대의원 출신인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대차에 일할 자리가 생겼으니 울산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2002년 5월 울산공장 정문을 처음으로 밟았다.

 

   

◇아들 해고 소식에 살던 집 뛰쳐나간 어머니 = 그가 들어간 곳은 정규직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한 자리였다. 3개월 뒤 산재 치료를 마친 정규직이 돌아올 날이 다 되자 사내 협력업체에서는 그에게 나갈 것을 권고했다. 그는 너무 억울하다며 현대차 노조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이 덕분이었는지 이를 본 노조 관계자와 원청업체 관리직, 사내 협력업체에서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고, 이른바 '땜질' 일이 있는 곳마다 그가 투입됐다. 그해 10월 그에게도 정해진 일을 줬다. 이른바 다소 안정적인 사내협력업체 장기 계약직 노동자가 된 셈이다.

그는 당시 시급 2280원을 받았다. 최저임금보다 시급 50원이 많은 금액이었다. 2010년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최병승 씨가 정규직으로 인정받는 대법원 판결이 있을 때까지 늘 최저임금보다 200∼300원 많은 식으로 사내 협력업체 직원 임금이 유지됐다. 연봉으로 치면 2000만 원 초반이었다. 주야 2교대에 보통 휴일 근무를 2∼3일 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급여였다.

2003년 7월 현대차 울산 공장 내 비정규직노조(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가 만들어졌다. 그도 조합원으로 가입했지만 활동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와 잘 지내던 형이 2005년 5공장 파업 지원에 적극적이었던 탓인지 해고됐다. 그리고 얼마 뒤인 그해 9월 복직투쟁을 하던 그 형은 목을 맨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얼마 뒤 10월 이 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죽기 전에 네가 정규직 되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라고 했다.

2010년 7월 최병승 씨의 일부 승소 대법원 판결은 현대차 울산공장뿐만 아니라 아산·전주공장 노동자까지 들뜨게 했다. 다들 곧 정규직이 된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 수는 600명에서 1700명으로 급증했다. 2010년 8월에는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던 비정규직도 법원에 '근로자 지위확인소송' 등을 집단적으로 냈다. 당시 그는 전화로 "엄마, 나 곧 정규직 된다"며 마냥 기뻐했다.

기쁨은 잠시였고, 들뜸은 곧 사라졌다. 현대차 사측은 다시 법적 대응을 할 뿐,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의 정규직화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비정규직 500명은 결국 그해 11월 15일부터 25일간 공장을 점거하며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다. 그는 1공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문 앞 집회 등에 참석하며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는 '적극 가담자'로 분류된 탓인지 그가 소속된 사내 협력업체로부터 2011년 2월 징계해고됐다. 사유는 근무지 무단이탈, 불법 파업 가담, 업무 방해, 무단결근, 취업규칙 위반 등이었다. 당시 징계해고된 이는 48명, 신규 업체와 계약을 거부하며 실직 상태가 된 15명 등을 합치면 60여 명이 점거투쟁 후폭풍을 맞아 공장으로 다시 못 들어갔다.

해고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이제 네가 알아서 살아라"며 집에서 나가 따로 전셋집을 얻어 지금까지 사신다.

2011년과 2012년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두 차례 회계부정과 전용 사건이 터졌고, 정규직을 기대한 이들의 실망감까지 겹쳐 조합원이 800명으로까지 줄었다.

◇희망버스, 아직은 멈출 수 없다 = 지난 7월 20일과 8월 31일 현대차 비정규직 사태 해결을 위한 희망버스가 두 차례 울산을 찾았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인 최병승 씨와 천의봉 지회 사무장은 지난 8월 8일 296일간의 철탑 농성을 접고, 내려왔다.

   

그는 아직 '희망'을 태운 '버스'를 멈출 수 없다고 했다.

"해고 뒤 2012년 집행부원으로 일하고 있다. 사측의 업무용 차량으로 두 번이나 납치됐고, 방어진에 버려지기도 했다. 지금도 그 차량은 공장 안을 버젓이 다니고 있다. 솔직히 내가 일하던 업체는 불법 파견으로 판정돼 현대차가 밝힌 3000명 신규 채용에 응하면 나는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공장 안 노동자는 다 같은 노동자다. 나만 정규직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껏 싸워온 게 너무 억울하다."

   

취재 자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한국노동운동연구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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