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과 뙤약볕으로 남부지방의 올여름은 길고 가혹했다. 나날이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는 기온에 35℃ 이하의 날씨쯤은 아무 감각도 없이 덤덤히 받아들일 만큼 익숙해졌을 때 처서를 맞았다.

더위 속에서도 처서는 처서다웠다. 어느 틈엔가 매미 소리보다 풀벌레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어느 하루 유난히 시끄럽게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울어댔다. 그 소리는 단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을의 전령처럼 들려오는 소리를 한동안 감상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때문에 나는 깊은 잠을 반납해야 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귀뚜라미가 6층 아파트 안방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우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쉼 없이 울다가 잠시 조용해지자 딸 아이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나보다며 마음을 놓았지만 그도 잠시, 귀뚜라미는 지치지도 않았다. 바로 머리맡에서 들리는 소음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기 사흘,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집안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시끄럽게 우는 저 울음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내야 했다. 곳곳에 귀를 대보고 얻은 결론은 바로 에어컨 속이었다.

일은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여겼다. 필터 뚜껑을 열어 보았다. 보일 리가 없었다. 에어컨을 마구 흔들어 보았다. 심하게 흔들면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기대일 뿐, 에어컨이 요동치면 뚝 그치던 울음소리는 잠시 고요하면 다시 반복됐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여름에도 한 번 써본 적 없는 살충제를 이용해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루 더 잠을 설치는 지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부랴부랴 가게로 가서 살충제를 한 통 사왔다.

'치익~.'

한 번의 살포에 그토록 꼼짝 않던 귀뚜라미가 툭 발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작고 약한 동물이었다. 힘없이 비틀대며 헤매다가 어느새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죽은 귀뚜라미 한 마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단지 한 마리의 미물이 아니라 맨 먼저 찾아온 가을이었다. 그런데 그 가을은 자리를 잘못 찾아온 것이었다. 풀밭에 있었더라면 제명대로 온전히 노래 부르다 갔을 텐데 어쩌자고 아파트 안방에 들어와서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쓰레받기에 담으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문득 말로써 먹고사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 깜냥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말, 위로의 말을 하려고 노력한다지만 그것이 어찌 모두 상황과 장소에 꼭 들어맞는다 할 수 있을까. 길을 잘못 든 귀뚜라미처럼 나도 엉뚱한 장소에서 남이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고 딴에는 소명의식을 다한답시고 열심히 시끄럽게 떠들어댄 것은 아니었을까. 무심코 했던 말로 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니었나?

여름은 마치 변심한 옛 애인처럼 갑작스럽게 떠났다. 귀뚜라미 소리 사라진 자리에 TV만 떠들어대는 방안에 서늘한 바람 데리고 혁명처럼 가을이 왔다. 새벽의 선선한 기운에 절로 이불 끌어당기며 아직 잠이 덜 깬 귀로 창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의 울음을 듣는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는 아득하고 정답다.

   

이 가을에는 꼭 필요한 자리에서 적당한 높이로 조화롭게, 그래서 듣는 이에게도 말하는 내게도 행복이 되는 말을 하며 살고 싶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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