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49) 통영별로 15일 차

오늘은 노성천 가의 풋개에서 마굿들을 지나 충남 논산 은진 땅의 관촉사에 이르는 길을 걷습니다. 지난 보름 사이에 가을이 성큼 다가와서 들녘에는 제법 황금색을 띤 벼들의 물결이 넘실댑니다.

◇초포원(草浦院)

초포원은 내성천의 풋개 곁에 둔 원집인데, 큰물이 들어 내가 붇거나 넘칠 때 길손이 몸을 피하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릴 수 있도록 나루 곁에 두었습니다. 풋개는 제방을 쌓기 전에는 강경(江景)에서부터 배가 거슬러 올라와 장이 열렸다고 합니다. 지난 번 살핀 주막과 원은 이런 수요에도 응할 양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루 자리에 둔 초포교량(草浦橋梁)은 이미 강희(康熙:1661~1772) 13년(1674)에 중수한 기록이 있으니, 이곳 풋개는 서해에서 온 선박의 회항지였던 셈이지요.

◇마구평

풋개에서 노성천을 건너 남쪽으로 논산시 부적면 소재지에 들면, 바로 마구평(馬廐坪)입니다. 이곳에는 백제를 국난에서 구한 아홉 장수와 그들과 참전한 아홉 말(馬九)에 얽힌 전설이 내려옵니다. 왕을 시해한 반란군 토벌에 나선 아홉 장수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타난 아홉 말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설화입니다. 내용은 따로 마구평 설화에 싣는 바와 같습니다만, 실제로는 이곳 지명이 마굿들(馬廐坪)인데 착안하여 동성왕 시해 사건에 가탁한 설화라 여겨집니다. 설화의 주 무대 가림성(加林城)은 동성왕 23년(501)에 돌로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이곳 재지세력인 백가에게 시해되고 말았지요.

마구평리는 부적면 소재지인데, <논산군지>에는 평천역(平川驛)의 역마에게 먹이를 주던 들이라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연산현 역원에 "평천역은 관아의 서쪽 10리에 있다"고 실었습니다.

충남 논산 풋개에서 마구평 가는 길. /최헌섭

마구평리는 교통의 요충에 있어 주막촌으로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반갑지는 않지만, 이를 증명하는 빗돌이 있습니다. 바로 종형제(從兄弟) 사이인 조병갑과 더불어 탐관오리로 악명이 높은 조병식과 관련한 빗돌입니다. 비는 가첨석을 갖추었고, 아래쪽은 콘크리트에 묻혀 있습니다. 앞에 '관찰사조공병식애민(觀察使趙公秉植愛民)'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그가 애민을? 개가 웃을 일입니다. 그는 1876년과 1890년 두 번이나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는데, 두 번 다 재임 당시의 부정이 드러나 귀양을 갔습니다. 특히 1890년에는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 청원을 묵살하고 탄압까지 더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켜 관찰사에서 경질되었고, 1894년에는 당시의 부정이 드러나 면천군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런 이에게 애민이라니요? 사촌 조병갑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이들 때문에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할 선정(善政)조차 까닭 없이 폄훼되곤 해서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신교를 건너 은진 땅에 들다

마구평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 부적로를 따라 가면 구정리 들머리에 '열녀안동권씨정려비(烈女安東權氏旌閭碑)'가 있습니다. 구정리에는 서로 다른 지명 유래가 전합니다. 하나는 원래 이 마을에 있었다는 아홉 우물(九井)에서 비롯하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 있었다는 거북정에서 유래합니다. 거북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반송1구 회관 옆 민가의 돌거북은 아무리 봐도 빗돌이 없어진 가첨석과 귀부(龜趺)가 분명한데, 마을 사람들은 자연석이라 믿습니다.

구정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새다리마을인 신교(新橋)입니다. <대동지지>에는 사교(沙橋)라 하였으니, 새·신·사를 관통하는 말은 새입니다. 이것은 새것이나 모래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동쪽을 이르는 우리말 '새'를 한자의 소리 또는 뜻을 빌려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교 또는 사교는 관촉사의 동쪽 논산천에 놓은 다리라는 말이겠지요. 지금은 옛 다리가 있던 곳에서 약간 북쪽에 새로 놓은 다리를 통해 논산천을 건넙니다.

◇은진(恩津) 관촉사(灌燭寺)와 은진미륵

내를 건너면 옛 은진 땅인데, 들머리 마을과 들은 관촉사에서 비롯한 관촉동과 관촉들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은진현 불우에 "관촉사는 반야산(般若山)에 있다. 돌미륵(石彌勒)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다. 전해오는 말에, 고려 광종 때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 오른 것을 중 혜명이 쪼아 불상을 이루었다 한다. 이색의 시에 마읍(馬邑) 동쪽 100여 리, 시진(市津) 고을 관촉사네, 큰 석상 미륵불은 '내 온다. 내 나온다'하고 땅에서 솟아났단다. 눈같이 흰 빛으로 우뚝 큰 들에 임하니, 농부 벼를 베어 능히 보시하네, 석상이 때때로 땀 흘려 군신을 놀라게 했다 함이 어찌 구전(口傳)만이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오. 하였다"고 실었다.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충남 논산시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 /문화재청

창건 연대는 미륵의 백호(白毫)를 수리할 때 발견된 묵기에 968년 기록이 있어 그즈음으로 헤아려집니다. 지명을 따 '은진미륵'이라 부르지만, 인상(印相)을 볼 때 관음보살이 분명합니다. 이색의 시에서 읊은 설화는 이러합니다. 한 여인이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갔더니 거기서 큰 바위가 솟아난 것을 봤습니다. 조정은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기기로 하고 혜명에게 맡기자 혜명은 100여 석공과 함께 36년만인 1006년(목종 9)에 완성하니,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상을 씻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백호가 빛을 뿜어 사방을 비추었습니다. 이때 중국 승려 지안(智眼)이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빛이 촛불 같다고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습니다. 이색의 시와 같이 여러 징험을 보였는데, 나라가 태평하면 불상이 빛나고 서기가 서리며, 어지러우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마구평 설화

-아홉 마리의 말, 나라를 구하다

논산문화원에서 간행한 <놀뫼의 전설>에 따르면, 백제 때 부적에서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무예를 닦던 아홉 장수가 있었습니다. 무예가 뛰어났고 의리도 좋았는데, 그들은 '언젠가 우리 무예를 사용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으니, 백제 가림성(加林城)에서 구가라는 좌평이 난을 일으켜 임금을 시해하였습니다.

아홉 장수는 '그동안 닦은 무예를 쓸 때가 왔다. 나라를 위하여 싸우자'며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습니다. 한 장수가 '이왕이면 탈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만, 구하지 못하자 그냥 떠나기로 하고, 밤에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밤에 아홉 장수가 잘 손질한 무기를 들고 약속 장소에 모였더니, 어디선가 말 아홉 마리가 율천(栗泉)으로 달려와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홉 장수는 하늘이 내려주셨다고 생각하고는 한 마리씩 잡아타고 가림성으로 향하였습니다.

백제 군사들이 적을 물리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던 중, 아홉 장수가 당도하여 닫힌 성을 바라보며 어찌할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타고 배회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홉 말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더니 공중으로 솟아 성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아홉 장수는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찌르고 성문을 열어 백제군을 불러들인 뒤 분전을 거듭하면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또 함께 참전했던 말들은 밖으로 달려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뒤로 밤이 깊으면 주인 잃은 아홉 말이 율천에서 물을 마시고, 주인을 기다리며 슬피 우니 사람들은 말 아홉 마리가 나타난 마을이라 하여 마구평(馬九坪)이라 불렀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