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연꽃과 따오기, 모두 자연이 준 선물이라예”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환경대전을 비롯해 각종 표창 18회 수상. 마산MBC 다큐 <떴다 우포 발바리>를 비롯해 방송·신문·잡지에 게재된 것은 셀 수 없고 중학교 3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도 게재.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 지킴이 30호. 석양이 진 우포늪 갈대 사이로 쪽배를 삿대로 저어가는 사진 모델로도 전국적 유명세. 13년째 우포늪에서 환경감시원으로 활동. 그가 항상 타고 다니는 80cc 오토바이에는 뉴트리아 포획 올무를 비롯해 우포늪 환경 감시하는 데 필요한 각종 장비가 항상 실려 있고 그가 만난 유명인사들과의 기념사진이 오토바이 바람막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주영학(66) 씨.

이제 우포늪을 얘기할 때 그의 얘기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만큼 환경 지킴이로 유명해진 그를 비가 오락가락하는 8월 5일 우포늪 대대제방에서 만났다. 작달막한 체구에 환경지킴이 모자와 조끼를 걸친 그는 모자와 조끼가 아니라면 천생 꼬장꼬장한 시골 할배 모습이다.

“여서 나서 여서 자랐고, 우리 아배 어매가 살다가 돌아가신 곳 아닌교. 그라고 저 늪을 함 보소. 얼매나 좋은교. 그기 단기라.”

우포늪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돌아온 답이다. 실제로 우포늪 환경지킴이로 일하면서 1주일에 이틀을 쉬는데 쉬는 날이면 우포늪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친 묘소에 올라 늪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한단다.

“만날 늪만 보고 사는데 이게 낙이라. 풀이고 새고 다 내 친구 아닌교. 그게 낙이라. 새도 나를 알아보는데 뭐. 3년 전 부엉이가 새끼를 쳤어. 부엉이는 걸음만 걸으면 둥지에서 나가는데 내가 산중턱까지 마중을 나간기라. 새끼가 위험해 보여서 내가 잡으니까 어미가 우에서 가갈거리는 기라. 손대지 마라고. 놓으니까 내 뒤를 살살 따라오고…. 부엉이도 내 맘 안다 아인교.”

새들이 주 씨를 보고 놀라지 말라고 항상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고. 그렇다고 옷이 한 벌밖에 없는 건 아니다. 늪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퇴근 후 그의 집으로까지 이어졌는데, 똑같은 푸른색 셔츠가 20여 벌 벽에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환경감시원 하면서 썼던 모자도 전부 '기록물'이라며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들도 알아볼 수밖에 없겠다 싶다. 새들도 알아보는 그는 늪과 새, 수초까지도 “모든 숨 쉬는 것은 다 똑같아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나…” 하는 생각으로 대해왔기에 오늘날 자리를 잡은 게 아닐까 짐작된다.

“새 머리 영리합니다. 기러기 함 보소. 얼마나 좋은교. 비행기 만든 라이트 형젠가 뭔가 하는 사람이 뭐 보고 만들었겠는교. 기러기 보고 만든 기라. 고니나 기러기 보면 브이자로 날아가요. 그걸 자세히 보면 맨 앞에 우두머리 그담에 청년 가운데 새끼 맨 뒤에 청년 이렇게 대열을 지어 가. 앞과 뒤의 청년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날아가는 기라. 앞뒤에서 튼튼한 청년들이 대열을 지어 날갯짓하니 새끼들이 있는 복판은 잠잠한 기라. 마치 태풍 한가운데는 바람이 없는 것 맹키로. 그렇게 새끼들도 힘 안 들이고 가는 기라. 수천 마리가 비행해도 낙오자도 없고 부딪히지도 않고 잘 가지.”

주 씨 눈에는 “사람은 안 그런다”. 서로 끌어내리고 질투하고 하는 게 한마디로 새보다 못하다는 것. 그래서 “지구로 봐서는 사람은 기생충이라. 지금 지구를 갉아먹고 있잖아. 왜 지구를 이렇게 만드느냐고. 그러니 없는 병도 생기고 얄궂은 병이 다 생긴다 아인교”라는 다소 ‘거친’ 얘기도 거리낌 없이 던진다.

마침 인터뷰하던 날, 우포늪에는 지금껏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올해 날아든 물꿩이 새끼를 부화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진작가들이 제법 모여들어 있었다. 주씨 애마 오토바이를 타고 탐방로를 달려 가봤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카메라에 우산만 씌워두고 작가들은 모두 비를 피해 자리를 뜨고 없었다. 내가 가진 카메라가 멀리 있는 물꿩 새끼를 촬영할 정도는 아니어서 연잎 사이 저 어디쯤 물꿩 둥지가 있겠거니 짐작만 하고 비 내리는 늪을 훑어보고 있는데 주 씨는 그 사이에도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부지런히 치운다.

/사진 정성인 기자

그의 일상생활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사진에 담으려 했는데 날씨 때문에 주로 감시 초소에서 인터뷰를 하다 보니 많은 활동을 보진 못했지만, 이것만 봐도 그는 천상 환경지킴이다.

막다른 골목 IMF

그가 이렇게 우포늪 발발이로 환경 지킴이가 된 것은 우연치고는 지독히 나쁜 우연이었다고. 열여섯 살부터 대구에서 오로지 ‘냄비 닦는’ 기술 하나로 가족을 이루고 두 자식을 키우던 신체 건장한 50대 초반 남정에게 IMF는 절망이었다. 다니던 회사는 문을 닫았고 졸지에 실직자가 된 그는 삶의 마지막 끈을 붙들고 혈혈단신 그가 나서 자랐고 부모가 사셨던 창녕군 이방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내 송태연 씨와 두 자식은 대구에 남겨두고.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 부모님께서 사셨던 집은 남아있었지만 모아 둔 재산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어릴 때 친구들이 있어 호구책은 마련할 수 있었다.

“직장 잃었지, 막막하더라고요. 촌에 집은 있는 거고. 막상 고향이라고 왔지만 살아갈 길이 없는 기라.”

예취기 사용법을 배워서는 고향 친구들 논밭이고 산이고 풀을 베어주면서 밥은 얻어먹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산불 감시원으로 일하게 됐다. 많은 보수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3년 넘게 겨울이면 산불감시원으로, 여름이면 풀 베는 인부로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97년인가 우포늪이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됐거든. 그때 군에서 환경과가 관할했는데 늪 한번 지켜보라고 추천해주는 기라. 노니 하지 뭐 그리 됐다 아인교.”

/사진 정성인 기자

산불감시원은 계절에 따라 하다가 말다가 하는데 환경지킴이는 1년 내내 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고.

우포늪의 추억

환경지킴이를 쉽게 수락한 것은 호구지책이라는 이유 말고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우포늪에 얽힌 추억, 부모님에 대한 추모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지 싶다.

“우리 아버지가 저기 저 대대 양배수장 책임자였지. 그때는 수리조합이라 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월급으로 내가 8남맨데 다 키울 수가 있었겠는교. 그래 대대 둑에 풀을 팔아서 자식들 건사하고 그랬는 기라.”

그때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다는 그는 어릴 적 추억을 술술 풀어낸다.

신안 주 씨인 부친 주정식 씨는 대대양배수장을 20여 년간 운영했다. 부모는 8남매를 두었는데 주영학 씨는 그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때는 여기 천지에 묵을끼라. 몰밤(말밤)은 말할 것도 없고 손으로 더듬어 붕어도 잡고 그랬다 아인교.”

먹고 살기 팍팍하던 시절 우포늪은 근동 주민이 배곯지 않게 넉넉한 품을 드러내 주었다. 당시 우포늪은 자연이니 환경이니 그런 것을 말하기 전에 소중한 식량 창고였던 셈.

“미군들이 기러기니 고니니 총으로 빵 쏘는 기라. 그럼 저그 가차이 떨어진 거는 저그가 먹고 멀리 떨어진 거는 우리가 먹고. 이쪽 제방서 총 빵 쏘면 저짝으로 날아가고, 저짝 가서 총 쏘면 이쪽으로 날아오고. 왔다리 갔다리 빵빵대는데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고 그랬지.”

새만 잡아먹었을까.

“여기 보면 독초도 제법 있어. 너쿨대라고 그게 디게 매운데 그걸 찧어서 물에 넣으면 붕어고 가물치고 기절하는 기라. 그러면 건져내서 잡아먹기도 하고, 싸이나라고 약을 쓰는 사람도 있었어. 죽어 떠오르면 내장 빼서 버리고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그랬지.”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우포늪에 기대 살아가는 세월이었다.

“저기 주매 잠수교라고 있어. 거기 오른쪽이 우리 어매 빨래터였는 기라. 하루는 빨래 갔던 어매가 집동만한 가물치를 빨래 다래이이 담아 집에 온기라. 너무 커서 주매 잠수교를 뛰어넘다가 못 넘고 다리 가운데 얹혀 있는 걸 보곤 빨래고 뭐고 다 비워놓고 다래이에 담아 온기라. 한데 아부지가 너무 커서 못 먹는다고 다부 갖다 놓으라시는 기라. 그 길로 어매는 늪에 가서 풀어줬는데, 말 못하는 그것도 풀어줘서 고맙다고 빨래하는 어매 앞에서 빙빙 돌다가 갔다더라고.”

노루 새끼를 잡아서 집에 갔다가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고 도로 살려준 얘기라거나, 늪에서 멱감고 놀다가 배고프면 말밤 따먹고 물풀 사이로 손으로 더듬어 붕어 따위를 잡아먹은 얘기까지 어릴 적 추억은 끝없이 이어진다.

“가시연꽃은 우포늪 상징인 기라. 어릴 때 지모구라 했는데 따가지고 가마에 넣어 썩히면 씨가 나오는 기라. 그거 모다가지고 찧으면 가루가 나오는데 그걸로 떡도 해먹고 그랬지. 지금 생각하니 그게 과자였던 기라.”

/사진 정성인 기자

당시에는 따오기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따오기라 안 하고 이름 모릉께 빨간새라 했는 기라. 아버지가 따오기라 안 하고 빨간새 봐라 그랬당께. 뜸부기는 쌨고. 농약 치니 안된다. 농약 치니 먹을 게 없으니 인자 암 것도 안 오지만….”

그렇게 배고픈 시절 근동 주민을 먹여 살린 우포늪.

“우포는 한마디로 우리 식량 창고입니더. 잘도 조개도 있재 말 잘피 있재. 그게 다 물 끼라. 우리 식량창고라. 우포늪은 그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거라요. 홍수면 물 저장했다가 가물면 흘려보내고. 강물은 말라도 늪은 안 마른다는 옛말이 있재. 늪 마르면 낙동강에 물 한 방울도 없거마. 낙동강은 말라도 늪은 안 마른다고. 물을 항상 머금고 있는 게 습지 아인교.”

가물면 뿜고 홍수 나면 저장하고 그런 기능을 가진 게 늪이라는 설명이다.

“그때는 제방이 저리 높지 않았어. 이 동네 물 들면 둑을 높여 쌓는 기라. 그러면 다음 해에는 저쪽으로 물이 들거든. 그럼 그쪽에 둑을 높이고…. 그렇게 서로 저그 동네 물 안 담을 끼라고 둑을 쌓다 보니 지금 우포늪 모양이 된 기라.”

그렇게 경쟁적으로 둑을 높이다 보니 이제는 웬만한 비에는 논에 물 담을 일이 없지만, 그게 더 큰 재앙이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물 담아도 사흘이면 다 빠졌는데, 요새는 물 빠지는데 예사로 열흘 걸린다 아인교. 사흘이면 곡식이고 식물이고 다 살아 있는데, 열흘씩 물 담아삐모 다 녹아내리삐는 기라. 그기 미련한 짓 아인교.”

어디서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닐 터인데도 자연에 맞서 대응해 온 인간의 노력이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토해낸다.

“우포늪 이기 다 자연이 주는 선물 아인교. 누구도 손 못 대는 기라. 손대면 결국은 재앙을 준다. 이걸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게 내 꿈인 기라.”

‘냄비 닦는 기술’로 살아온 세월

그렇게 철없이 초등학교, 중학교를 고향에서 마친 그는 대구 공고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쳤지만 떨어졌다. 재수 같은 건 꿈도 못 꿀 시대였는지라 곧바로 선학알루미늄 공장에 취직했다.

“그때가 내가 열여섯인가 그랬을 낀데, 그때부터 평생을 냄비 닦으면서 살아왔다 아인교.”

그렇게 결혼하고 아들과 딸도 생겼지만, 생활이란 게 늘 고만고만했다. 달세 방을 전전하며 자식 둘을 대학 다 시켰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말을 못하겠단다.

/사진 정성인 기자

“허허, 냄비 닦는 그것도 기술이라고 그때 돈으로 20만 원이면 큰돈인데 그걸 선금으로 주면서 오라는 기라. 그래 몇몇 회사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 아인교.”

그 분야 기술자로서는 제법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살림살이는 늘 고만고만했다. 아니 삶이 버겁기까지 했다.

“아이들 콤퓨터 한 대 없이 다 키웠다 아인교. 그때도 대부분 집집이 콤퓨터 있던데 우리가 못사니까…. 계명대 전자계산학과 다니던 아들이 매일 늦게 오는 기라. 12시 넘어 오는 기라. 와 이리 늦게 오냐니까 아들이 콤퓨터 그거 하고 늦게 온다는 기라.”

그런 아들이 대학 1학년 마치고 군에 갔다. 어느 날 “아버지 내일 군대 갑니다” 하고는 훌쩍 떠나버리더라는 것. 얼마나 놀랐을까 짐작 간다.

“그래 군대 갔다 오더니 3학년 때 삼성에서 스카웃 해 가삐더라. 그래 니 졸업하고 우리 회사 들어오라 그기라. 공납금 다 대줄 낀게. 그래가 입사하고 1년 동안은 공납금 갚는다고 집에 돈 1원도 안 보태주고 다 갚았지. 지금은 연구소 있어.”

구미 있다가 서울 간지 4년 됐다는 아들, 부잣집에 시집갔다는 딸. 그래서 “천지 걱정 없지. 인자 다했다 아인교” 한다.

살아있는 우포 박물관

대대제방 환경감시 초소에서 인터뷰 중 퇴근시간이 됐다. 안그래도 그의 집에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퇴근하는 그를 좇아 그의 집에까지 갔다.

이방면사무소 옆에 있는 그의 집은 부모님이 모두 임종하신 곳이다. 방 두 개에 마루가 하나인데, 아버지께서 임종했다는 방은 그가 묵는 곳이고, 마루는 둘이 마주앉아 얘기하기도 불편할 만큼 사방이 각종 자료로 쌓여 있었다. 어머니께서 임종하셨다는 방도 마찬가지.
최근엔 집 뒤쪽에 방 한 칸짜리 집을 새로 지었다. 이름하여 ‘영빈관’. 유명인사들이 하도 자주 찾아오다 보니 지금 집에서는 ‘모실’ 수 없어 자고 갈 수 있는 집을 새로 지었다는 것.

얼마 전 KBS <한국인의 밥상> 진행자인 최불암 씨가 와서 보고는 직접 창녕군수에게 전화하여 “살아있는 생태박물관 주영학 선생을 잘 보살펴주라”고 당부했다는 그 집이다.

집에 들어서자 마루 사방을 꽉 채우고 있는 책장이 눈에 띈다. 책장 위로 빙 둘러쳐 있는, 2011년 5월 11일 세계습지의 날 기념식에서 받은 대통령표창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열되어 있는 국무총리 도지사 군수 사회단체 언론으로부터 받은 상장과 감사패 액자가 눈길을 끈다.

“참 표창도 많이 받았네요”라고 말을 꺼냈더니 “저게 다 짐 아인교” 한다. “해야 할 일, 봉사정신 가지고 스스로 했”는데 상을 여기서 저기서 주니 부담스럽다는 것.

“한번은 미국 교포가 와서 나를 찾는 기라. 납니다 했더니 호텔에도 비행기에도 크게 걸려 있다더라면서 만나게 돼 영광이라대. 독일에서도 와서 그래. 내가 부끄러워서…. 상 받으니 더 힘드는 기라. 더 열심히 해줘야 돼.”

/사진 정성인 기자

‘우포늪이 아내’라는 주 씨. 돈 버는 것은 없지만, 창녕 군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온 것뿐인데 이렇게 주목해주니 ‘부담 백 배’라고 손사래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런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은 세태임에랴.

다시 녹음테이프를 앞으로 돌려본다. 대대제방에 있는 환경감시 초소에서 인터뷰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이 익은 어른이 들어온다. 가만 보니 내가 주 씨를 만나러 가는 길을 잘못 들어 목포제방 쪽으로 갔을 때 만났던 환경지킴이다. 대대제방 가는 길을 자세히 일러주던 이다. 그가 꼭 기사에 넣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말이 귀에 쟁쟁한다. 혹시 오늘 내가 그런 것은 아닌가?

“진짜 높은 사람들은 다 걸어서 탐방해요. 근데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골프칸가 뭔가 그거 타고 탐방하더라고요. 자연 앞에서 자신의 권세니 뭐니 그게 뭐라고. 우포늪에 권세 자랑하러 오나요?”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