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첫 무술영화. 이소룡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엽문(양조위 분)의 일대기. 어쩔 수 없이 낯설다. 왕가위의 영화는 늘 꿈결 같았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2046>…. 주인공들은 평범한 일상의 공간 속에 섞여 있지만 늘 홀로 떠 있는 섬이었다. 뜨겁게 사랑하지만 아프게 외롭고 자유로운 듯 부유하지만 현실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빤하고 익숙한 엽문의 스토리로 과연 무엇을 만들어낼지, 혹 실망하지나 않을지.

<일대종사>(一代宗師). 한 시대의 위대한 스승. 영화는 그저 아름답고 우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꿈결 같은' 대결 장면으로 시작한다. 몸과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근육과 뼈가 으스러지는 절체절명의 현장에서 느끼는 황홀함, 경외감. 때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어떤 숙명적 싸움들. 영화든 무술이든 결국 그것은 하나의 언어이고 인격이다. 왕가위는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마치 '궁극의 무예를 펼치듯' 쏟아부어 영화로 위대한 무술가들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현한다. "<일대종사>는 내게 중국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정신의 방법을 알고 있는 스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왕가위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홍콩으로 이주했다.)

<일대종사>의 한 장면. 엽문(양조위)과 제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 사진이다. 엽문 왼쪽 꼬마가 어린 시절 이소룡.

무술 세계를 다룬 영화지만 사람이 죽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때론 누가 누구를 꺾었는지도 모호하다. 엽문 이전의 '일대종사' 궁대인(왕경상 분)이 제자에게 죽음을 당하는 비극적 순간도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는다. 창문 너머에서 사람들의 소리로 최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고 누가 죽느냐가 아니다. 영원할 것 같던 위대한 존재의 쓰러짐과 패배는 언제나 말초적인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차마 볼 수 없는, 결코 카메라를 들이대서는 안 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까지 피해갈 수는 없다. 엽문을 비롯한 무술의 대가들은 존경과 명예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와 마주 선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의 시기를 거쳐, '과거'의 것을 지우며 근대화를 추구한 공산당 정부의 등장. 이제 가장 높은 산은 무림고수도 그 누구도 아닌 '생활'이었다. 우아한 몸짓과 상대에 대한 예의, 품격 있는 대결 따위는 사라져갔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이 넘쳤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끝난 것일까?

궁대인이 자신을 죽인 제자에게 끝까지 간절히 전하고 싶었던 무술의 마지막 경지가 있었다. "돌아보라." 비록 '앞만 보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됐지만, 가족과 집 모든 것을 잃은 엽문 역시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고 살아가지만 지나온 세월의 기억과 흔적, 무술인으로서 진정한 정신까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홍콩으로 터전을 옮겨 다시 제자들을 가르친 엽문의 '생활'은 이소룡을 키워냈고 홍콩영화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마침내는 왕가위의 <일대종사>를 탄생시켰다. <일대종사>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을 있게 한 어떤 빛나는 시간들과, 그 시간이 빛을 잃지 않도록 끝내 견뎌내고 살아냈던 위대한 스승들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 왕가위는 그 시간을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 6년의 기획, 3년의 촬영. 무려 9년이라는 진심. 그는 중국 대륙 곳곳을 다니며 무예 고수들을 만나 무술을 배우고 조언을 구했다. 당신은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이렇게 절절하게 긴긴 시간을 바칠 자신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도 '일대종사'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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