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48) 통영별로 14일 차

경천역(敬天驛)이 있던 오늘 여정의 출발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은 교통의 결절지인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줄곧 남쪽으로 걷지만 예서 동쪽 길은 신원사로 향하고 동남쪽으로는 용두를 거쳐 연산 가는 길과 갈립니다. 그러니 지난 여정에서 경천역과 관련한 불망비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까닭을 알 듯합니다. 그것은 역터도 아니고 옛길도 아닌 697번 지방도 가에 옮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경천역 불망비

빗돌이 서 있는 자리는 양화저수지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월산천에 드는 내와 도로가 만나는 남쪽 지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모두 3기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는데, 각각의 빗돌은 냇가에서부터 전승지김공교준시혜불망비(前承旨金公敎駿施惠不忘碑), 경천역사음박준학청덕시혜비(敬天驛舍音朴準學淸德施惠碑), 관찰사심공의신청백선정비(觀察使沈公宜臣淸白善政碑)입니다. 이 가운데 경천역 사음 박준학의 빗돌은 을사년에 소작인(小作人)들이 세운 것인데, 그의 직임이 사음(舍音·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던 사람으로 마름이라고 한다)이라 했으니 그는 경천역의 마위전을 관리했던 이로 여겨집니다.

◇이산(尼山)에 들다

옛길은 경천장터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곧장 남쪽으로 열렸습니다. 예서 얼마 걷지 않아 남서쪽으로 흘러 월산천에 드는 내를 건너면, 옛길은 용머리 마을에서부터 무동산 서쪽 기슭을 따라 곧게 열렸습니다. 용머리를 지나 산지기가 살던 산직(山直) 마을을 거쳐 지경리 지경처(地境處)에 듭니다. 바로 이곳이 예전 이산(尼山, 지금의 노성)과 공주가 경계를 이루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 남았습니다. <여지도서> 이산현 도로에 이곳 지경처의 경천로에서 관아까지 15리라 했으니 부지런히 걸으면 곧 노성에 들겠지요.

지경처에서 노성을 향해 남서쪽으로 걷다 보면, 옛길이 경작지에 잠식되어 부득이 691번 지방도를 따라 노성천을 건너게 됩니다. 이즈음을 흐르는 내의 옛 이름은 석교천(石橋川)이고 이곳에는 황교(黃橋)라 불리던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월교를 통해 이 내를 건너면 바로 맞은편에 노산(魯山)이 바라보입니다. <여지도서>에 "노산은 관아의 북쪽 5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고 나옵니다. 기록처럼 이 산에는 성이 있어 노성산(魯城山, 348.9m) 또는 성산성이라고도 하며, 그곳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오래된 산성과 봉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 이산은 내륙에 자리하고 있어 읍치에 성을 두지 않고 배후의 진산에 있던 성으로 외적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산봉수는 남쪽으로는 은진현 황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공주의 월성산에 응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노성천을 건넌 옛길은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안터에서 차돌모랭이를 향해 부라들을 종단합니다. 이곳은 차돌이 많이 박힌 모퉁이에 있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이 모퉁이를 돌면 옛 이산현 소재지인 노성에 듭니다.

◇이산을 지나 초포를 향하다

마을 들머리에 앞술막이란 이름이 남은 걸 보면, 예로부터 오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물론 지금이야 술막은 없어졌지만, <구한말한반도지형도>를 보면 이즈음이 교통의 결절지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예서 곧장 남쪽으로 길을 잡아가게 되지만, 남서쪽으로 난 길은 <여지도서> 산천에 관아의 남쪽 3리에 있던 고해랑(高海浪)입니다. 이 책에는 고해랑을 '큰 언덕이 가파르게 솟았고 그 위로 길이 났다.'고 묘사하였습니다.

앞술막 갈림길에서 초포로 이르는 길은 노성산 남동쪽 기슭과 충적지의 경계를 이루는 기스락을 따라 열려 있는데, 지금까지 걸은 길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서정적인 길로 다가옵니다. 사진에서 보듯 이 길을 걷는 동안 지난여름의 그 모진 무더위를 벌써 잊어버릴 만큼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날씨가 선선하니 들에 나와 밭을 매는 아낙들과 늙은 부부가 같이 방제 작업을 하는 모습이 평화스러워 보입니다. 길가 논에는 벼가 영글어 가고 있고, 길모퉁이의 밤나무는 곧 탐스러운 밤톨을 쏟아낼 기세입니다. 이렇듯 숭성골에서 요동 성재골 문턱골 만화동을 거쳐 초포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은 아름다운 길입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하도리 문턱골에서 초포로 이르는 옛길.

이 길이 끝나는 즈음에 있는 항월리 초포(草浦)마을은 노성천 남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초포원(草浦院)이 있던 곳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산현에 "초포 남쪽 언덕에 있다."고 하였고, <동국여지지>에는 "초포 남쪽 물가에 있다."고 했다가 <여지도서>에 이르러 "지금은 없어졌다."고 나옵니다. 이곳에 원을 둔 것은 통영별로와 삼남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이곳에 놓인 초포교를 통해 노성천을 건너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곳에 두었던 초포석교의 존재를 실증하는 자료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는 초포 마을 앞 냇가에 묻혀 있던 것을 캐내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둔 것이라 하는데, 두께가 23㎝의 화강암으로 만든 튼튼한 빗돌입니다. 빗돌에는 초포교량중수(草浦橋梁重修)라고 쓰고, 시주자의 이름과 강희십삼년갑인사월일립(康熙十三年甲寅四月日立)이라 새겨 1674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옛길은 초포석교를 통해 노성천을 건넙니다. 예전에는 돌다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새로 만든 콘크리트 다리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초포교량과 초포원 외에도 교통의 요충임을 일러주는 최장사와 팔장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소개합니다.

옛날 항월리 서변마을에는 최장사(崔壯士)가 살았고, 이곳 초포에는 팔장사(八壯士)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장사는 어찌나 힘이 세던지 바위를 마치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았을 정도라고 전합니다. 달리 초포에 살던 힘이 센 여덟 형제를 팔장사라 했는데, 그들은 횡포하여 이곳의 길목을 막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팔장사의 악행을 전해들은 최장사는 그들을 혼내기 위해 이곳 초포에서 그들과 싸워 굴복시키고 맙니다. 그 뒤로 못된 짓을 할 수 없게 된 팔장사는 어떻게 최장사를 이길 수 있을까 별별 묘안을 다 내어 대결하였지만 이길 수 없자 결국에는 그를 없애기로 작당하였습니다. 하루는 물에 젖은 밧줄과 절구통을 들고 최장사를 찾아간 여덟 형제는 그를 초포 주막으로 꼬여내어 동이 술을 권하여 최장사가 크게 취하자, 그를 젖은 밧줄로 꽁꽁 묶고 절구통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최장사가 있는 힘을 다해 밧줄을 끊어내려 하자 팔장사가 무지막지하게 도끼로 그를 후려쳤습니다. 초주검이 된 상태로 겨우 집으로 기어간 최장사는 결국 죽고 말았고, 그로부터 다시 팔장사는 초포를 오가는 길손들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전해 옵니다. 지금도 최장사의 무덤은 서변마을 뒷산에 있다고 전합니다.

이 전설은 이야기의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이곳 초포가 교통의 요충임을 잘 드러내고 있어 소개한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이야기가 권선징악을 내세울 때에는 반드시 선이 악을 물리치는 서사구조를 펼치게 되는데, 여기서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결말을 보이고 있어 이야기의 사실성이 더욱 더해집니다. 어떻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부당한 방법으로 힘을 행사하는 무리가 폭력적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야 마는 이 이야기에서 지금의 현실에서도 너무나 흔하디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폭압을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초포교량중수비.

◇왕건(王建)과 왕전리

이곳 항월리 초포 서쪽 마을은 후삼국 통일전쟁과 관련한 전설을 간직한 왕전리(王田里)입니다. <여지도서>에 "민간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견훤을 공격할 때 좋은 징조의 꿈을 하나 꾸었다고 한다. 무당에게 물어보니 무당이 풀이하며 말하기를 '서까래 세 개를 짊어 진 것은 왕王이라는 한 글자이고, 쇠로 만든 관을 쓰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임금이 앉는 용상에 앉는 것이며, 온 세상이 닭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것은 대궐에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미래에 그러한 날이 오면 마땅히 두둑이 보답하겠다'고 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 토지를 내려 보상해 주고 또 외명부의 품계를 내려주었다. 까닭에 그 마을 이름을 왕전리라고 부른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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