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일의 연속이다. 가치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무가치의 역습. 대한민국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왁자지껄한 것일까?

"예술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장 보드리야르는 일갈했다.

TV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얼굴도 몸뚱이도 그들의 이야기도 예술이다. 시시한 대의 민주주의가 만들어 놓은 선거의 함정도 예술이고, 국정원이 주도하는 TV 뉴스는 예술을 넘어 가관이다.

마치 산만한 시청자를 잡아 두기 위해서 기억에 들어 있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갈아주는 모양이다. TV는 예술이다. 열기 가득한 여름을 밀어내는 가을 바람도 예술이고, 이브 몽탕의 때 이른 가을 노래도 이 밤엔 예술이다.

이 세상에 너무 예술적인 것이 많다 보니 뒤샹과 워홀은 오히려 예술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예술이라고 우겼다. 물론 대중들의 동의도 구했고 급기야 현대예술의 전형이 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의 발전 논리로 평면성을 설파했던 1940년대 이후 그린버그의 논의들은 수없이 비판받고 의심되어 왔다. 그럼에도 예술의 조형성은 평면성, 추상성에서 얻어진다는 믿음은 일종의 권위가 되어 대한민국의 미술계를 여전히 유령처럼 지배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미술의 양식은 여름철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저마다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며 정당운동을 방불케 하는 정치적 수사를 구사했다. '자유! 반항! 상상력!' 같은 낱말들은 알맹이도 없이 발터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같은 멋진 이름 뒤에서 여기저기 시체처럼 쌓여갔다.

현대 미술은 체제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표현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파시즘과 나치즘, 전체주의적 코뮤니즘 앞에서 좌절했다.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폭력은 튀어나온 가지들부터 잘랐다. 탄압의 정도는 그것의 위대함과 비례했다.

1940년대 그린버그 시대의 한편에서 자유를 반납한 독일인들은 무능력하고 가난한 독일을 한 방에 개혁해줄 강력한 지배자를 원했다. 삶의 확실성만 부여해 줄 수 있다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나치즘과 파시즘이 만개한 심리적 배경이 되었다.

무한한 자유가 부여한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서 현대인이 취할 수 있는 반응 중에 '자유의 반납'이 있다고 한다. 불안을 선사하는 자유로부터 탈출해서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준다고 선전하는 절대권력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최고로 여기는 '안정된 삶'의 실체라는 것이다.

   

갑자기 내 자유의 한계에 대해, 혹시 우리가 매우 자발적으로 자유를 반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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