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과 가을 시작, 며칠 비로 뜨거운 여름이 시나브로 한풀 꺾인 지난주 오후 남편과 함께 김해 대동면의 산해정을 찾았다.

조선시대 지어진 서원으로 유학자 남명 조식이 제자들과 강학을 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뜸한 무척 한적한 곳이다. 올해만 세 번째 산책이나 되는 그곳은 집에서 십여 분 정도만 차를 굴리면 닿을 수 있는 만만한 곳이기도 하지만 사실 자주 찾게 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언제나 내 경우엔 그 서원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자리한 그 동네에 대한 묘한 끌림이 더 컸던 탓이다. 무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그 동네만이 주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자꾸만 이끌리게 되는 건 마치 질리지 않는 애인을 오랫동안 곁에 둔 느낌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과 나른함에 분별없는 삶만 연명하게 될 때 늘 새로운 기운과 영감을 호흡하여 소생케 하는 곳. 아니 영감 강렬한 도인이 먼 예언의 날을 기다리면서 조심스레 혁명의 기운을 숨기며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곳. 바로 그것이 이 동네가 이름처럼 산을 등지고 먼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산해정보다도 더 숭고한 느낌을 주는 이유.

그런데 아무래도 그곳에 대한 끌림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닌지. 언제 가더라도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으나 싱싱한 담쟁이가 붙어 자라는 촉촉한 돌담 집들을 지나면 특이한 느낌의 사원인 반냐라마와 넓은 뜰이 늘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 오른편으로는 찻집이자 단체 식당처럼 보이는 큰 단층 건물들이 있고 주황색 가사를 걸친 스님들은 평범한 집안일에 온통 열심이다. 물론 십자가를 대문에 매단 집들도 몇 가구 보이고, 집 앞 대나무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점쟁이 집들도 몇 채 숨어 있으리라.

이러한 범상치 않은 기운 깊숙한 명당 자리에 바로 산해정이 있다. 산해정 앞뜰에 자리를 깔고 누워 선선한 산바람에 몸을 맡긴 나는 몇 백 년 전의 이 동네와 서원을 한번 상상해본다. 보기 흉한 공사 구조물이나 집들 없이 오로지 높은 산과 밭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강과 하늘뿐이었을 이 곳을.

그 묘한 끌림의 끝은 자연스레 '아무래도 남명 조식은 그러저러한 흔한 유학자라기보다 차라리 자연과 인문의 보이지 않는 기운과 잘 교감하는 무당이나 도통한 도사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한다.

몇 주 전 여름방학 동안 김해에 놀러온 학교 아이들에게 이곳을 못 보여 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양산이 고향인 지혜와 유진에게 무더운 날씨와 임신한 몸의 불편을 핑계 삼아 제대로 김해 구경을 못시켜준 것이 지금도 마음 한편 미안하다.

   

김해 구 시가지와 수로왕릉을 눈으로 지나치고 연지공원 호수만 잠깐 둘러보고 돌아갔던 그네들의 뒷모습에 이 동네와 산해정이 자꾸만 겹쳐 떠오른다. 영감을 찾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그 문학 소녀들에게 내가 이곳에서 받은 묘한 끌림을 선물처럼 다시 느끼게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서은주(양산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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